2024년 9월 18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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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루카 7,31-32)
이 세대 사람들인 유대인 지도자들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들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드는 지들!"(이사 5,20).
이 말은 예언자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라고 하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온갖 고난과 전체와 치유를 품은 이 단일성만이 진실로 위로를 줄 수 있다. 하느님의 위로는 순수하고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하다. 피조물의 위로는 온전히 치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자신 속에 부정을 담고 있어서 자기와 다른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분리와 분열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하느님
만이 맑게 비치는 하나이며 전일(全一)할 수 있다.
하느님이 “부정의 부정”이라면 또한 하느님은 어둠의 부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느님은 빛이다. 하느님은 분리의 부정이다. 하느님은 통일성이다. 하느님은 야트막한 것의 부정이다 - 하느님은 깊이다. 하느님은 통제의 부정이다 - 하느님은 자유다. 하느님은 추함의 부정이다 – 하느님은 아리따움이다. 하느님은 슬픔의 부정이다 - 하느님은 위로다. 하느님은
이름의 부정이다 - 하느님은 고요한 무명씨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단언신학의 하느님. 곧 존재와 빛인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간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피조물이 추구하는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와 생명을 주는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기꺼이 신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복이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241)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9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8,9-17.28-30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7절: 대 탁발수도회
도미니코와 그의 수도회|:
도미니코는 1170년경 칼라루에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인격은 프란치스코와 완전히 달랐으나 의욕은 그와 비슷하였다. 그는 수도 참사회원으로서 행한 1204년의 로마 여행에서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파 운동으로 인한 치명적인 영향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사도적 청빈에서의 순회 설교가로서 그들의 개종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로부터 엄격한 청빈의 회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또 어떤 것, 즉 확고한 신앙의 설교를 위해서는 좋은 신학교육도 필요하다는 것을 첨가하였다. 이 점에 도미니코는 특별한 가치를 두었다. 그가 1215년에 로마에서 그의 새 “성직 수도회”의 인가를 청원하였을 때,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아우구스티노 회칙을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호노리
오 3세는 1216년에 이 새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1217년에 피레네 산맥 기슭의 프루이유에 최초의 도미니코회 여자 수도원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성 도미니코의 알비파에 대한 선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형성되었던 열심한 여인들의 단체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프란치스코회의 것과 비슷한 세속인들을 위한 제 3회가 여기에 첨가되었다.
이 무조건의 청빈 이상은 또 두 수도회에 의하여 채택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우구스티노 엄률 수도회로서 1256년에 교황의 인가를 얻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가르멜회로서, 1228년 성지에서 유럽으로 이주해 와서 1247년에 역시 탁발 수도회로 제정되었다. 여기에 1452년에 여성 가르멜 수도회도 첨가되었다.
이상의 네 개의 탁발 수도회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큰 의의를 지녔다. 이 수도회들은 가장 인기있는 민중 사목자들만이 아니라 중세 전성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지들도 배출하였다.(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