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은 날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받은 상처의 의미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영광의 상처이고,
반대로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만
프란치스코의 상처는 영광의 상처라고 해도 좋을까요?
한 마디로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영광의 상처가 아닙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성공주의자가 아니고,
그러므로 그가 얻고자 한 것은 상처이지 영광이 아니며,
상처를 받고자 한 것도 성공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목표성취적 상처가 아니라 인격적인 상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치룬 대가가 너무 커서
모든 것을 잃고 얻은 그런 영광을 상처뿐인 영광이라고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도 회개하기 전에는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였었고,
회개 후에도 한 때 성공과 실패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시작한 삶이 형제들에게 심한 반대를 받았을 때입니다.
형제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초기의 이상대로 살 수 없게 되었고,
유능하고 현실적인 형제들은 프란치스코에게 현실수용을 요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자기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소명이 좌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받은 소명은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것인데
그 이상이 실패하고, 하느님의 집을 고치는 개혁이 좌절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책임자의 직책에서 물러나고 고뇌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기도 중에 프란치스코에게 물으십니다.
이 수도회를 세운 것이 누구이냐, 너이냐 나이냐?
주님께서 수도회를 세웠는데 왜 네가 걱정하느냐는 질책이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세운 수도회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성공과 실패에서 완전히 가난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상의 실현에서 인격적 관계의 완성에로 돌아섭니다.
하느님의 사명의 수행자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관상가가 됩니다.
그러면서 형제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주님의 상처로 바뀝니다.
이웃에게 받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상처로 시선을 옮긴 그가
주님의 상처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제 더 나아가 자신의 상처로 주님을 사랑한 결과가 오상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받는 상처들도 주님의 상처로 바뀌도록
우리의 상처로 주님의 상처를 관상하고 사랑할 것을 다짐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