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合當하다, 부당不當하다.
무엇이 합당하는 것은 무엇이 무엇에 합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당하다는 것도 무엇이 무엇에 부당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그 자체로는 부당하거나 합당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서는 늘 정당正當할 뿐입니다.
기준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가 정당하다는 사람은 그러므로 늘 자기가 기준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과 같이 살아도,
아무리 옳고 거룩한 사람과 같이 살아도 그를 기준 삼지 않고
늘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은 아마 하느님께도 그럴 겁니다.
하느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순 제 3주일은
존재는 하느님이 기준이어야 하고
행위는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존재가 하느님께 합당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가 하느님 기준에 맞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합당하게 거룩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 합당한 성전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잡것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어떤 탐욕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겁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이 행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염두念頭에 두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계명을 염두에 둔다는 게 무엇입니까?
계명을 늘 생각하는 정도입니까?
그것은 늘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생각에 두서頭緖가 있고
생각의 제일 앞자리에 하느님의 계명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실상 저의 문제를 보면 하느님의 계명을 생각지 않는 게 아닙니다.
생각의 앞자리에 있지 않고 의지의 끝자락에 있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어찌 그리 하고 싶은 게 많습니까?
이곳 대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무얼 많이 해서 아니 되는 수련소에 왔는데도
벌써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해야 하고 아이디어가 팍팍 튑니다.
나쁜 일은 아니고 다 좋은 일이긴 한데.....
그런데 존재가 하느님 기준에 맞지 않고,
행위가 하느님 계명에 맞지 않을 때
주님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시고 또 실제로 그러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제 1 독서는 얘기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더렵혀진 성전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당신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과격하게 정화하십니다.
자신은 정당하다고 하는 하느님께 부당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이렇게 과격하게 정화하시자 부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합당한 주님의 성전을 허물어버리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 짓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당하고 합당합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도 그리 정당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성전을 정화하시기 전에 스스로 정화해야 하는데,
꼭 회초리를 들어 정화하시게 하여 주님 마음 아프게 해드립니다.
그러니 이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는
하느님께 합당치 않은 우리 성전을 합당하도록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허황된 생각, 쓸데없는 생각, 음탕한 생각,
온갖 욕심들, 곧 소유욕, 애욕, 성취욕,
이런 것들을 치워버리는 것이겠지요?
무엇이 합당하는 것은 무엇이 무엇에 합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당하다는 것도 무엇이 무엇에 부당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그 자체로는 부당하거나 합당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서는 늘 정당正當할 뿐입니다.
기준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가 정당하다는 사람은 그러므로 늘 자기가 기준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과 같이 살아도,
아무리 옳고 거룩한 사람과 같이 살아도 그를 기준 삼지 않고
늘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은 아마 하느님께도 그럴 겁니다.
하느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순 제 3주일은
존재는 하느님이 기준이어야 하고
행위는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존재가 하느님께 합당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가 하느님 기준에 맞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합당하게 거룩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 합당한 성전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잡것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어떤 탐욕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겁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이 행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염두念頭에 두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계명을 염두에 둔다는 게 무엇입니까?
계명을 늘 생각하는 정도입니까?
그것은 늘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생각에 두서頭緖가 있고
생각의 제일 앞자리에 하느님의 계명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실상 저의 문제를 보면 하느님의 계명을 생각지 않는 게 아닙니다.
생각의 앞자리에 있지 않고 의지의 끝자락에 있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어찌 그리 하고 싶은 게 많습니까?
이곳 대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무얼 많이 해서 아니 되는 수련소에 왔는데도
벌써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해야 하고 아이디어가 팍팍 튑니다.
나쁜 일은 아니고 다 좋은 일이긴 한데.....
그런데 존재가 하느님 기준에 맞지 않고,
행위가 하느님 계명에 맞지 않을 때
주님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시고 또 실제로 그러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제 1 독서는 얘기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더렵혀진 성전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당신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과격하게 정화하십니다.
자신은 정당하다고 하는 하느님께 부당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이렇게 과격하게 정화하시자 부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합당한 주님의 성전을 허물어버리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 짓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당하고 합당합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도 그리 정당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성전을 정화하시기 전에 스스로 정화해야 하는데,
꼭 회초리를 들어 정화하시게 하여 주님 마음 아프게 해드립니다.
그러니 이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는
하느님께 합당치 않은 우리 성전을 합당하도록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허황된 생각, 쓸데없는 생각, 음탕한 생각,
온갖 욕심들, 곧 소유욕, 애욕, 성취욕,
이런 것들을 치워버리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