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린다는 뜻 아닙니까? 지옥으로 가는 길이 온갖 악덕, 특히 교만으로 칠해져 있듯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모든 덕, 특히 겸손이 인도합니다. 모든 악의 뿌리는 교만이고 모든 선의 뿌리는 겸손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1 참조)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잘못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결국 내 가 하느님보다 더 좋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더 좋게 될 수 있고, 더 좋은 것은 가장 좋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기에 더 좋은 분이 될 수 없고, 더 좋은 분이 아니기에 가장 좋은 분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 세 마디 – 좋은, 더 좋은, 가장 좋은 - 는 하느님의 실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하느님은 지혜로운 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도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은 존재다라고 말하면, 그것도 틀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존재 너머에 계신 무이기 때문입니다. (271)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2코린 8-13장 / 1테살 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인연생기법은 그러므로 다양한 불교 종파와 전통을 그 밑바탕에서 아우르는 주춧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줄여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부르는 이 근본적인 실재관은 삼라만유,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연계 안에 있는 것이나 초자연계에 속하는 것이나, 정신적 인 것이나 물질적 인 것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그 자체가 홀로 불변하는 실체로서 자존하는 것은 없고 직간접적인 인과 관계와 구조적 함수 관계를 통해 ‘지금 여기' 그렇게 현성(現成)할 뿐이 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식론적 전회'인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았고 깨닫고 그래서 마침내 해탈하여 '절대 자유인'이 된 실질 내용은 흔히 동서 종교사에서 말하는 천계의 비밀도 신들의 구원 계획도 아니다. 이 근본적인 ‘인연생기'의 법을 바로 본 자가 곧 진리를 본 자요 해탈자요 깨달은 자이다. 문제는 단순한 인식론적 관점의 변화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들어 이 ‘연기법'을 확철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원시 불교의 가르침을 압축 요약한 ‘네 가지 진리의가르침'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이란, 흔히 불교의 기초를 모르는 일반인이 오해하듯이 허무주의를 주창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삶을 고통으로만 보는 비관주의를 설파하거나 행동 없는 정적주의를 선호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다.(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