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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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6-18)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인 나병 환자 아홉은 감사한 미음을 잊버리고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 주십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옮겨 온 타민족이었지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그 일이 일어난 데는 뜻이 있습니다. “그 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라는 구절은,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이 진술은 엑카르트가 걷고 있는 영적 여정의 첫째 오솔길과 일치한다. 엑카르트는 첫째 오솔길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정욕을 대하는 엑카르트의 관점이 만족과 불만족의 관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불만이 가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욕망을 다스리는 이분법적 방법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는 화해, 곧 반지로 상정되는 조화를 더 선호한다. 어쩌면 그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설교와 맥을 같이하는 바오로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어떤 태도가 새사람의 특징인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봉사직을 주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저들에게는 그 범행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는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2코린 5,17-19). (278)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2-9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인노첸시오 3세:
최근의 연구에서는 인노첸시오 3세를 그가 비록 타고난 지배자요 황제였을지라도 항상 첫째로 사제요 사목자로 머문, 종교심이 깊고 내적으로 경건하고 금욕적이고 엄격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완전히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감에서 직무를 이행하였다. 그가 사용한 이 칭호는 이후 교황의 자기 표현 중 하나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세니(Segni) 출신의 로타리오는 1160년 오래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와 볼로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고, 그의 백부인 클레멘스 3세 교황 때(1181∼1191) 추기경이 되었다. 몸집이 작고 우아하고 연약한 체질이었으나 폭넓은 지식과 함께 돌출한 정신력과 형안(炯眼)과 현명과 절제,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교황직에 대한 높은 영적인 이해를 겸비하고 있었다.
교회적인 광신자이거나 “순 정치적 교황” 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그는 문화적 •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인 영역에서 긴장과 대립으로 가득차 있던 그 시대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큰 개방성을 보였다. 그는 내적인 일관성과 권력으로 대립적인 경향들을 당시의 상황에 따르면 교황직만이 할 수 있었던 통일적인 질서원리로 복종시켰다.
인노첸시오가 세속문제에 개입하였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건들도 하느님에 의하여 제정된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국왕과 제후들도 하느님의 심판에 종속되어 있다는 책임과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위계제도 다시 말해서 하나의 거룩한 질서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때에는 순 정치적인 것과 순 영적인 것, 교회와 국가간의 정밀한 구별은 교차와 “침해”가 없었을 정도로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교황은 ‘죄의 이유에서”, 질서가 도덕적 과실이나 객관적인 불의로 인하여 방해될 때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모든 미해결의 논쟁문제에서 “세상의 심판관” 이기도 하였다.(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