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을 듣고 헤로데는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옛날에 아주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났는데
그것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는 구절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과연 이 노래처럼 님을 만나고 싶었던 걸까요?
그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구원자를 만나고 싶었던 까요?
물론 이것도 아니었을 거고 그것은 거의 틀림없이 여러 소문 중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죽은 자의 망령亡靈이 되살아났다거나 망령에 사로잡혔다는 말이 있는데
헤로데의 경우는 세례자 요한의 망령이 살아났나 생각한 것일 겁니다.
또는 범죄자는 반드시 자기의 범죄현장을 돌아본다는 말도 있는데
헤로데도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완전범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를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이든 헤로데는 과거 자기가 죽인 요한에 사로잡힌 것이고,
그래서 예수를 실제로 만났다 할지라도
과거의 요한으로 인해 새로운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범한 죄는 떠나지 않고 그 사람 주위를 맴돌고 있고,
인간은 진정한 회개로 상대와 완전한 화해를 이루지 않는 한
과거에 매여 살고, 자기가 잘못한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미래에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가지 못하게 하며,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백성사를 주며 자주 이런 애기를 합니다.
고백성사란 말 자체는 과거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지만
단지 죄를 빠트리지 않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진실한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화해와 새로운 출발로 이어져야 한다고.
그러므로 고백성사는 새로운 출발의 성사입니다.
진실한 뉘우침과 죄의 고백으로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삶을 출발할 때 고백성사는 완성됩니다.
그럴 때 새로운 관계 안에 새로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헤로데처럼 죽은 망령을 붙들고 있지 말고 새로운 예수님을 만나고
과거의 죄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오늘을 출발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