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존중하는가?
나는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인가?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엘리야가 와서 지금처럼 어지러운 우리나라를 바로잡아준다면,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면 환영하겠지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만일 환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잡는 그분이 내게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환영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환영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맞이할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남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좋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싫고,
또 내 잘못을 내가 바로잡는 것은 좋지만 남이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싫고 환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잡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는다면 주님도 엘리야도 오실 필요가 없고, 오시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려는 관성이 대단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바로잡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바로잡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으로 심하게 굽은 척주를 교정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에 이처럼 바로잡는 예언자를 환영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억지로라도 맞이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바로잡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라고 파견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면 그 파견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잡아주려고 할 때 ‘어서 바로잡아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당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온갖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다시 오는 엘리야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고치는 데 급급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잘못을 같이 바로잡아가려는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열정이 고통을 무릅쓰고 더 나아가 삼켜버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정, Passion.
엘리야의 열정,
세례자 요한의 열정,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정(Passion of Christ)을
이 대림절에 다시 생각하는 오늘 우리이고 제2의 엘리야들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