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5일 대림 3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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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대림 3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입당송을 시작으로 화답송, 독서 그리고 알렐루야와 복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내용은 기쁨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서에서 주님안에서 늘 거듭해서 기뻐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사도 바오로의 체험처럼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랑은 본질적으로 기쁨입니다. 사랑의 생활에 있어서 첫째 열매는 마음속에 샘솟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영혼 깊은 데서 고요하게 샘솟기에 자연히 우리의 눈에, 얼굴에, 태도에, 몸짓으로 즉시 나타나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성공에서 기쁨을 얻는 것 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화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맛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데 있음을 삶의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흥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내는 그곳에 완전한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화를 내고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 가끔 필요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며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찬미할 때 얻는 그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기쁨은 감사입니다. 기쁨은 자선 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란 주는 것이고 나눔이고 사랑입니다. 감사란 기쁨을 돌려주는 행위이며 사랑을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자선은 친절과 관용, 내적 기쁨을 누리도록 영혼을 정화시켜 줍니다. 이런 선한 행위의 기쁨은 우리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덕스러운 행동이 가능하고 가치 있으며 그러한 행동을 반대하고 좌절시키는 악덕의 행위보다 더 즐겁고 더 풍부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참된 기쁨이란 깨끗한 열성과 부지런함, 선한일을 기쁘게하기 위한 마음의 재빠름과 내적 외적 마음가짐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기쁨은 변화된 회개 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선 자체에 이르렀을 때에 얻게 됩니다. 기쁨은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게 됨으로 영적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지내고 있는 자선주일의 참된 의미는 자선은 먼저 자신이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 기쁨안에는 감사와 사랑이 함께 흘러 나오기에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을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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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7-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도(聖徒) 이야기
여기는 비록 숲에 근접한 곳이긴 하지만 ‘낭떠러지 아래서’ 라는 그의 성(姓)의 의미처럼, 니클라우스(Niklaus)는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두 서너 개의 바위아래서 태어난 사람이 골짜기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이다. 그 산봉우리에는 우리가 “펠젠(F elsen)"이라고 부르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절벽이 있으며 이를 낭떠러지(Flüe) 라고 부른다. 이 곳에서 위에 언급된 이름의 성(姓)이 유래한다. 타고난 농부답게 니클라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일터로 나갔다. 그 시대에는 특히 시골에서 허리를 굽히치 않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일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성서에 씌어진 대로 아담이 낙원을 상실한 후 주께서 “너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취하리라”라고 말했었던 바로 그 아담의 후예로 여겼다. 그는 젊은 시절을 지나 성인의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결혼을 했다. 그는 주님의 멍에(결혼)는 틀림없이 감미로울 것이라 믿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직접 성스러운 입으로 “멍에(결혼)를 통해서 성장하고 증식하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명심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멍에 속에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인으로부터 잘 생긴 아들과 딸을 얻었기 때
문이다. 그는 결코 간통하지 않았고 환락에 빠져들지도 않았으며,자신의 욕구에 의해서는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오비디우스(0vidius)가 “중도를 결으라 .그러면 그대는 가장 안전한 길을 걷게 되리라”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며 환락과 허영보다는 차라리 가난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덕을 타고났기 때문에 이웃시민들은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그가 한동안 모든 사람에게 성실하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선택된 이웃이며 감사할 만한 이웃이라는 명예를 누리며 살았다. 그런 후 그는 이 타락한 생활을 떠나서 은둔 생활을 하기를 동경했다. 그가 얼마나 이를 열렬히 동경했는지는, 이미 여러 해 전에 그의 뛰어난 용기로 악마를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육체의 욕구를 끊어버린 생활을 하고자 결심했던 것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