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독서 말라키 예언서의 예언 곧
‘보라, 그가 온다.’라는 예언대로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얘기이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얘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즈카르야는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합니다.
곧 아기의 이름을 하느님의 지시대로 지어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결과 즈카르야는 막혔던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생각해보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오늘을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즈카르야는 자기 뜻대로 된 것이 없는 일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낳기 위해 그는 일생 자식 없이 불행하게 살아왔고,
겨우 애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자녀가 아닌 주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일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래도 말년에 아들을 낳았으니 해피엔드라 하고,
해피엔드이니 행복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으니 결코 행복하였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인생이란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잘 되고 행복한 일생이었으며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야겠지요.
내 자식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는 대로 되길 바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불과 잿물처럼 쓰고자 하십니다.
남을 단련하고 정련하는 역할입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런 인생 너무도 고달픈 인생입니다.
나를 단련하고 정련하는 것만도 고달픈데 남까지 단련하고 정련해야 하니.
그렇잖습니까?
불과 잿물을 누가 좋아합니까?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도 세례자 요한과 즈카르야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면서
좋아서 되고,
좋아서 하는,
그런 사람이 우리가 아니고,
그런 인생이 우리 인생이 아님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