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8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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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
그래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가리켜 “당신의 적들을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완전한 찬미가 나오게 하셨습니다”(시편 8,2 철십인역) 하고 말합니다.
.. 이 박해 때에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습니다. 한편 하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나라를 찬탈한 사악한 임금 헤로데는 파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된 아기들은 마땅히 어느 누구보다 오래 산 셈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우리 주님이 말씀히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 배로 받을 것이요,또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마태 19,29). 하지만 여러분이 백 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서 무언가를 버린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실로 여러분이 천 배의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서 무언가를 버린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만 제대로 버린 것입니다.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내게 찾아와 이런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모든 토지와 재산을 버리고 나의 영혼을 건졌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대가 버린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다. 그대가 이미 버린 것을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버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버린 것이다.”(30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5-2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하느님 신앙과 유교의 지평 융합
유교는 한민족에게 있어서 불교와 더불어 1,600년 이상 함께 숨쉬어 온 사상이자 종교이다. 한민족에게 전래된 연대로 말한다면 블교보다도 더 앞선 것이다.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추세에 비하여 유교의 현실 적응 능력과 속도가 지체되는 감이 있어서인지 젊은 세대에게는 유교가 과거 전통의 유물 정도로만 오해되는 면이 있다
유교가 단순히 도덕 철학을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냐 종교냐 하는 논쟁은 학계에 꾸준하지만 필자는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본다. 기독교나 불교처럼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나 예불을 드리거나, 정직 제도가 있거나,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조나 교리가 뚜렷이 없다는 점에서 유교를 종교라고 생각히끼 어렵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 종교 또는 신앙이란 무엇이냐하는 근본 물음앞에 제기되는 새로운 의견이 더 설득력 이 있다.
한 종교가 종교로서 성립되는 필요충분 조건에는 문자로 된 경전, 정기적 종교 집회, 성직제도와 같이 외견상의 구성 요건만이 중요한 것은 이니다. 앞서 말한 예처럼 정기적인 종교 의식 집회가 있다든지, 전담 성직자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든지 , 경전을 비롯하여 중심 교의나 교리가 있다든지 하는 조건은 오히려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종교 집단을 지속적으로 운영 하는 데 필요한 이차적 요건들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종교 신앙이란 외면적 조건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성에 뿌리박는다고 한다. 라이문도 파니키쇄 따르면 종교란 ‘초월성을 향한 실존의 개방성"이며, 알프레드 스미스에 따르면 "종교란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그 무엇"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폴틸리히는 ‘종교란 인간의 긍극적 관심"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에, 의식주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 속에서 왜 사는지, 우주 . 자연 . 사회 .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를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은 이미 종교적이라고 한다. 유교학자 뚜웨이밍(杜維明)은 유교
를 "생존하는 인간이 자기 초월성의 진정한 가능성을 믿는 하나의 신앙”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