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8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얼마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는가?
제가 달고 다니는 말 많은 혀로 말미암아
침묵의 천국에서 떨어져 나와
알지 못하는 파멸과 어둠 속에 빠졌습니다.
저는 덕행과 믿음이 탄탄한 참된 제자
베드로가 아니라,
무수한 죄로 출렁이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팔을 내밀어 주시지 않는다면(마태 14,31 참조)
항해술을 배우지도 못한 저는
얼마나 쉽게 조난당할지 모릅니다.
-프루덴티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엑카르트는 바깥에 있는 장소나 외부의 도움에만 의존하지 말고,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에 하느님이 머물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외부에 있는 이러저러한 곳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그러한 사람은 일터에서도, 사람들 속에서도, 어떤 장소에서도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를 합일로 초청하는 하느님은 “사라지지 않는” 하느님, 따라서 특별한 수련 방법보다 훨씬 오래가는 하느님이다. 우리는 외적인 장소가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외적인 고행이나 요령을 통해 무아경에 이르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엑카르트가 조언했듯이, 금욕주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단식을 하거나 외적인 고행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선한 삶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보다 더 나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것을 더 사랑하여 덧없는 것을 경멸하는 것입니다.(31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2.3요한 / 요한 1-4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이 시점부터 교황직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프랑스 왕권의 압력으로 프랑스인들이 추기경단에 점점 많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다음 교황들도 프랑스인이 되었다. 클레멘스 5세 (1305∼1314)는 벌써 로마로 가는 것을 필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리옹에서 착좌식을 거행하고,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는 좀 주저한 후 1309년 아비용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직:
로마시 포기와 아비뇽으로의 교황좌 이전은, 그 보편적 중요성이 옮겨지는 징조였다. “영원한 도시”라는 말에는, 수세기의 전통을 통하여 민족들의 의식 속에 그곳의 주교좌서 베드로의 후계와 교회의 수위권 이념만이 아니고, 로마 제국에 의하여 기초가 놓여진 서구의 보편주의에 대한 이념도 함께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아비뇽은 완전히 프랑스 왕권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비록 그것이 1348년에 인근의 모든 지역과 함께 클레멘스 6세에 의하여 매입되었고 교황의 자치 영역이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주위가 프랑스 왕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따라서 전세계로부터 완전히 밀폐되고 고립되어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교황들이 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정책에 대한 격렬한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지켰던 것 - 즉, 황제의 포위와 정치적 우세로부터의 자유 - 을 이제 프랑스인 교황들은 자발적으로 프랑스 왕권을 위하여 포기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결정권을 포기하였고, 민족들 앞에서 그들의 중립적이고 보편교회적인 권위를 상실하였다. 종종 그들은 야만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프랑스 지배자들의 수중에서 무기력한 도구 노릇을 하였고, 국제정치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리고 보편교회적인 일치사상이 파괴되었다. “아비농 유배”(1309∼1378) 끝에 대이교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교황권과 교회에 최대의 위기를 가져왔다.(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