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이 말을 들으면서 무엄하게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마리아만 좋은 몫을 택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마르타가 택한 것은 좋지 않은, 아주 나쁜 몫일까?
사실 마르타가 택한 것은 사람들이 맡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는 자신을 위해서는 나쁜 몫을 택한 것이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당신과 공동체를 위해 나쁜 몫을 택한 마르타를
주님은 어찌 나무라시듯 하시는 것일까요?
진정 주님은 마르타를 나무라시는 건가요?
그러나 설사 나무라신다고 해서 주님께서 마르타의 사랑,
당신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의 그 고귀한 사랑을 모르신다거나,
주님께서 마리아만 사랑하고 마르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거나,
사랑치 않아서 나무라시는 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보다 마르타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마르타를 보고 바보같이 너만 희생만 하지 말고
마리아가 누리는 것을 너도 누리라고 하시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공동체를 위해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봉사자에게
덕분에 좋은 말씀을 듣거나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이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으로 그만 일하고 쉬라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르타를
주님께서는 염려하고 걱정하시는 거라고 할 수 있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챙길 것은 챙기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는 말씀은
마르타의 몫은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서는 마르타의 몫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머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일에 신경 쓰느라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함을 걱정해야 합니다.
많은 일은 큰 일,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일은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
크고 중요한 일에 언제나 자리를 양보해야 할 자잘한 일들입니다.
그런 자잘한 일에 염려와 근심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고 근심할 것까지 없는 일에 쓸데없이 염려하고 근심할 때
눈이 번쩍 뜨이게 우리는 종종 극단적인 부정법을 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고, 다른 것은 쓸 데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신 것입니다.
몇 해 전부터 그러해온 것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더욱 자주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오직 주님만 내게 남는 노년을 묵상합니다.
저는 매일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고 말씀 나누기에 글 올린 다음
수련자들과의 공동묵상으로 일과를 시작되는데, 어제 공동묵상 때
다시 노년을 묵상을 하다 보니 이런 기도가 입술에 맴돌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더 늙으면,
제가 사람들에게 줄 것도 없고 사람들이 제게 필요한 것도 없게 되면,
그때 사람들은 저를 다 떠나고 제게는 주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주님 안에 머무는 것만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오직 필요한 한 가지를 지금부터 충실히 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지금부터 저의 사랑을 집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