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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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9,14)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먹보라서가 아니라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며 나중을 위한 토대를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실습하게 하심으로써 이미 그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직접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하셨더라면, 부담스럽고 기운빠졌을 것입니다. 사실 단식에 관한 질문이 있은 뒤에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어서 제자들은 많이 침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요한이 고난을 당한 일로 자신들을 높게 생각했던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풀어 오른 자만심을 당신의 말씀으로 내리누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말씀은 아직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꺼내신 주제, 곧 인간으로 여겨지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리라는 주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활이리는 주제는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좋은 뜻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즉,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십자가와 그림자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집착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받는 고통은 “상처를 주지도 않으며 , 견디기 힘들지도 않다. 엑카르트는 일백 마르크의 돈을 가지고 있다가 사십 마르크를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잃어버린 사십 마르크에 골몰한다면. 그는 절망과 슬픔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가 잃어버린 것과 자기의 고통에 마음을 쓰고, 그것이 자기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슬픔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겠습니까? 그가 자신이 잃어 버린 것과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면 볼수록, 이번에는 그 잃어버린 것과 고통이 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을
걸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게 말을 걸면 걸수록, 그 잃어버린 것도 그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러면 그와 그가 잃어버린 것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 바라볼 것입니다.(345)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3-17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이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당신은 우아하고 부유하며 존경을 받는 가문의 어머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비록 과부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위안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기도에 대해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놀랍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온전한 보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올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당신 안에 이러한 생각을 심어주신 분께서 틀림없이 대답까지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놀랍고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마음이 어두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걱정스러워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이 걱정스러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마태 19,24-26 : 루카 18,25) .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느님께는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부자도 히늘나라로 가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을 넣어주시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이 세상에서 육체와 더불어 살고 계실 때에 부자인 자케오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