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과 주님께서
이끌리어 광야로 간다는 것이고
거기서 시련과 유혹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기 동사들의 공통점은 피동적입니다.
이끌리다.
유혹받다.
구원받다.
인도자가 있어서 이끌리고
유혹자가 있어서 유혹받고,
구원자가 있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자와 유혹자와 구원자가 실은 다 같은 분이십니다.
유혹자는 인도자와 구원자와 다른 분일 것 같은데 같은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여기서 실은 다 같은 분이라고 얘기했는데
마귀가 유혹자이지만 실은 성령께서 유혹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유혹받으시는 데 있어서 성령과 악력은 협력자였습니다.
성령께서 악령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구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데 이것은 이런 우리 믿음을 완전히 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믿음과 다른 성숙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유혹에서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구하신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악이 아니라 죄의 악에서 구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이 일단은 악 곧,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단은 악이라는 것은 이단이나 삼단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단 곧 믿음 성숙의 일 단계는 유혹이고 시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은 유혹과 시련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주님의 유혹 얘기는 근동 지방 성년식 과정과 같습니다.
근동에서 성년식을 할 때가 되면 아이를 광야로 내몰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어른이 되고 성년식을 거행하잖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흔들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가 형제들을 양성할 때도 마구 흔드는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마구 흔들어댔으니 그때의 저는 양성자에게 아주아주 나쁜 놈이었지요.
그런데 실은 나쁜 놈 악마가 아니었고 양성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를 흔들 때 양성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흔들수록 더 꽉 붙잡지요.
그렇게 꽉 붙잡도록 저는 흔들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성소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부족하고
성소를 이어갈 힘도 끈기도 부족한 표시이니 일찌감치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성소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그냥 잘해줍니다.
그러다가 입회를 표명하면 성소자 관리에 들어가고,
수도자가 될 만한지 시험하고 흔들어대는데 지금의 저는
마음이 약해져서 옛날만큼 마구 흔들어대지 못하고 살살 흔듭니다.
그래서 저를 반성합니다.
마음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약해진 것이 아닌지.
더 모질게 흔들어대고 그러면서 시련을 같이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일단은 시련을 주지만 그것이 단련의 이 단계로 넘어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단련의 이 단계를 거쳐 승리의 삼 단계로 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또 다른 반성도 합니다.
나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인지.
성령에 이끌리어 유혹받는 사람인지.
성령과 함께 악령과 싸워 승리하여 구원받는 사람인지.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