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저주받는 자와 복 받는 자를 대비합니다.
저주를 받는 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이고,
복을 받는 자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이 말에서 의지와 신뢰라는 단어가 대비되며
의지-저주, 신뢰-복의 대비도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법과 어감에서 신뢰 관계는 좋지만,
의지 관계는 탁 들어도 좋지 않은 어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에게 의지해야만 서 있을 수 있고,
그가 없거나 몸을 빼면 그대로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의지해도 이렇게 좋지 않은데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돈에 의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에 자기의 행복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의 행불행이 돈에 좌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건 돈이건 의지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것에 좌우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사람이나 돈에 두고, 하느님께 두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마치 나무가 물가에 있지 않고 광야와 소금땅에 심긴 것과 같다고
오늘 예레미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돈에 의지하기에 하느님께 자기 구원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부자는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고 행복하려고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도 하느님께 복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않고 부자 청년처럼
가족이 있고 돈만 많이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단절하고 이웃과도 단절하고 살았을 겁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나자로처럼 귀찮은 존재들은 봐도 못 본 체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영원한 생명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범이 아니라 아예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오늘 복음의 부자는 두 가지 다 실패한 것이고,
그래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단절이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에 간 것입니다.
행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구원은 하느님만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