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병자는 대답대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치유를 원하는 말이나
믿음에 대한 고백이 아닌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해주십니다.
그가 치유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들 것을 들고 다니는 것이
눈에 걸린 유다인들이
치유된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는 다시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치유해 준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것을 들고 가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
자신을 치유해 준 사람이 예수님임을 알게 된 그는
유다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치유부터 끝까지
치유된 사람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강해지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합니다.
들것을 들고 가다가 유다인들 눈에 띈 다음에도
내가 원해서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오랜 시간 병을 앓아서 마음이 약해졌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낫고 싶은 마음에 그는 벳자타 못가에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갖기보다는
왜 나는 나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이제껏 건강해지지 못하고
여기에 그대로 있는지 하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에도
희망으로 대답하기보다는
자신이 건강해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내 힘으로 물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나는 병자가 아닙니다.
내 발로 걸어들어갈 수는 없지만
건강해지는 것을 꿈꿀수는 있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 38년이라는 시간이
그가 꿈꾸는 힘을 약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히 다릅니다.
내가 꿈꾸기 위한 이유
꿈꿀 수 있는 근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작게나마 가능성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 가능성은
그 근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려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