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야훼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욕과 수모를 받지만 당하지는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면 절대 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과 모욕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피할 수 있어도
고통과 모욕을 절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고통과 모욕은 내게 천부당만부당한 것으로 생각했고,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결단코 거부했지요.
그러나 살아갈수록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너무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그저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인생의 종착지로 다가갈수록 고통의 파고가 더 높은 고통의 바다임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실상 살아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고
반대로 죽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고통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인생에 다소곳이 순명하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고통을 인생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슬픕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고통을 당하지 않고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수난주일, 주님의 고통 사랑을 우러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야훼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욕과 수모를 받지만 당하지는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면 절대 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과 모욕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피할 수 있어도
고통과 모욕을 절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고통과 모욕은 내게 천부당만부당한 것으로 생각했고,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결단코 거부했지요.
그러나 살아갈수록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너무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그저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인생의 종착지로 다가갈수록 고통의 파고가 더 높은 고통의 바다임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실상 살아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고
반대로 죽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고통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인생에 다소곳이 순명하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고통을 인생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슬픕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고통을 당하지 않고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수난주일, 주님의 고통 사랑을 우러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이 못난 죄인인 저를 위한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