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성 목요일 묵상은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데
이 만찬에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끼지 못하셨을까?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최후 만찬을 하셨을까?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작별하신 것이 다였을까?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최후 만찬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혹 어머니 마리아와 최후 만찬을 따로 하셨더라도
성경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사적인 것이고 구원사적 의미는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과만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도 사적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도들과의 만찬이고
그러므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만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베드로만 씻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도 씻어주신 것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행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 베드로의 개인적인 죄,
곧 주님을 배반하는 죄를 짓더라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그 사랑의 의지를 보이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류의 모든 죄 곧 세상의 죄를 세상 끝날까지 다 없애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찬례 제정의 뜻입니다.
제자들과의 최후 만찬은 성찬례이지 제자들과 고별 식사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하고만 드신 식사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 만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모든 사람에게 재현되는 거룩한 만찬입니다.
아시다시피 최후 만찬에 관한 복음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다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것을 재현하라는 것이고,
공관복음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이 예를 기억하고 재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빵은 당신 몸으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바치시는 사랑이고,
포도주는 당신의 피요 계약의 피로서 세상의 죄를 씻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문제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옛날 우리말 미사 통상문에서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흘리는 내 계약의 피”였는데 새 미사 통상문에서는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리는 내 계약의 피”로 바뀌었고 이때 논란이 있었지요.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 곧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모든’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이라고 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논란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신다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죄 사함의 피를 흘리시면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시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실 리가 곧 소수라도 배제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아무리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셔도
그 비와 햇빛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받지 않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러니 선한 사람이 받고 악한 사람이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배제하시는 사람은 없지만 배제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주님께서 배제하시는 사람은 없지만 주님 사랑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
그 사랑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랑을 재현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봉헌하는 성 목요일 만찬 미사는 기억이요 재현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며,
우리를 위해 당신 전부를 바치시는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재현 배우들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