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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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요한 21,5)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아이 같은 순박함
폐다고기아(pedagogia)는 낱말 자체에서 드러나듯, 아이들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아이’의 뜻을 잘 생각해 보고, ‘페다고고스’(pedagogos)에게 그들을 맡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찬양하고 순박한 믿음의 다양한 양상을 여러 가지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제자들은 이때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가 되어 있던 이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심으로써 ... 아이들이 지닌 순박함을 우리가 본받을 태도로 제시하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무식이 있는 곳에는 결점과 공허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금수와 같은 사람의 길입니다. 원숭이나 바보의 길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무식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는 원숭이나 바보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변모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무지 - 변모된 지식 - 는 무식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유식에서 무지의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지식에 의해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무지는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고귀하게 꾸며질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활동을 하던 때보다 더 완전해질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한 대가는 듣는 기능이 보는 기능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해 지혜를 더 많이 터득하고, 들음으로써 훨씬 더 지혜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이교 학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죽음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제자가 스승의 면전에서 더 높은 학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자는 죽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치켜들고는 제자의 말을 귀담아들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내가 이 학문을 배워 영원한 기쁨을 맛보았으면 좋겠구나." 봄은 우리를 바깥 것에게로 향하게 하는 반면, 들음은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안쪽에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속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각 덕택이 아니라 청각 덕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보는 행위가 내게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영원한 말씀을 듣는 사건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봄은 성취하는 행위이고, 들음은 받는 행위입니다.(376)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11-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참된 삶이 있고 위로가 없는 메마른 상태가 있은 후에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이 다음 세상의 삶은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죽음을 없애고, 이 다음 세상에서 받게 될 위로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없앨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유혹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음rhk 같이 말합니다.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시니(시편 116,8).
더 이상 유혹이 없는 곳에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약속된 선한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받은 것을 보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땅에서
야훼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시편 116,9).
그곳에서는 이곳에서와 같이 죽음의 사막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여러분은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인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더불어 영광속에 나타날 것입니다(골로 3,3 이하참조).(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