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이라는 병은 사람을 고립시키는 병이었습니다. 전염되는 병이었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처럼 멀찍이 서서(17,12)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사제들이 사람들의 깨끗함과 부정함을 판단해 주었는데, 부정하다고 판단 받은 사람들은 사제들이 깨끗하다고 다시 판단해 주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병을 치유해 주실 수도 있음에도,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17,14)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사제에게 갔고, 가는 동안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사제에게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고, 깨끗하다는 판단을 다시 들었을 것입니다. 나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그 사실에 굉장히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보게 됩니다. 병이 치유된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나병이라는 것을 통해 그 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얻게 되는 것인데, 병이 깊을수록 죄가 깊었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렇기에 나병 같은 불치병은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기에 공동체에서의 추방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갈라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로 인한 병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청에 하느님께서는 정말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병이 치유되었고, 그 말은 구약의 관점에서는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들은, 비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음에도, 그래서 그 자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했음에도, 여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고립된 채, 그 관계의 회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한 사람만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겼던 사람만이, 육체적인 치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겼기에, 하느님께서 치유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청할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그는 병의 치유를 받았고, 그렇기에 그 믿음은 다시 감사함으로 그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였다는 것,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병의 치유를 받았다는 것, 열 사람 모두에게 이 세 가지는 똑같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 이유가 달랐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마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단절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이라는 차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 중 어느 것에 더 중심을 두는 가라는 차이에서, 병의 치유를 받은 후의 태도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디를 보면서 가고 있는가요? 인간과의 관계에 더 중심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 중심을 두고 있는지. 물론 우리의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치유를 받았다는 결과에서는 열 사람 모두가 똑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 중심을 두었던 단 한 사람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천국에 간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없는 천국,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천국이라면, 그것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