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사가 없는 날이니 말씀 나누기가 아니라
어제 성 금요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저는 오래간만에 양성 수도원,
특히 수련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우리만을 위한 전례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3시간에 걸쳐
아주 의미 있고 풍성하게 드렸고,
십자가의 길은 수도원이 아닌 밖에 나가서 6시간에 걸쳐 하였습니다.
어제 아침 키레네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었는데
나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까 고민을 하였지요.
고민고민하다가 저는 두 가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마음고생에 동참하고
12시부터 3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몸 고생에 동참하기로.
마음고생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까지 겪으신 것들,
겟세마니에서의 그 마음의 번민, 다시 말해서
수난을 피하고픈 마음과 감당해야 하는 것 사이의 번민,
감당해야 할 수난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이나 유대인들의 조롱으로 인한 수치심,
10처에서 옷 벗김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욕을 당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한 저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전역에 가서 구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 금요일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저는 새터민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도 구걸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후원회원들이 보내 주시는 것으로 편히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수치를 당해 얻은 것을 조금이나마 장학금에 보태고 싶었지요.
그러나 막상 구걸을 하며 수치 당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두렵고 떨려
대전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나오는 첫 사람에게 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대 남자였는데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 차디찬 무시를 경험하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져서
거의 1시간을 도움을 청하려다 그만 두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또 청하니 이번에는 “에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겟세마니의 주님처럼
그만 두고픈 마음과 한 사람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그 두 마음 사이에서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두 번 밖에 구걸을 못하고 12시가 되어 역을 떠났습니다.
이어진 몸 고생은 마라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번민만 하고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저는 보상심리로 혹독하게 몸 고생을 시키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2시간을 달리고 중간 중간 1시간은 걸었습니다.
아침, 점심을 굶고 3시간을 달리니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길 것이 못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몸을 학대하다시피 했는데도 마음은 찜찜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확실히 수치와 모욕의 고통이
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견디기도 힘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의 가난이 절실하거나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다면
저도 수치와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하지도 주님과 새터민을 너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민만 많이 했지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모욕과 수치를 당함,
이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제 사랑의 정도입니다.
그래도 제가 위안 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수치와 모욕을 제가 당하였고,
구걸도 많이 하였다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실패 덕분에 저는 겸손할 수 있었고
주님의 실패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해 빵 두 개만 가지고 섬에 들어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끝나갈 때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에
빵 두 개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완전 단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주님과 똑같이 완전한 단식을 하였다는 자만감과 허영에 빠질까봐
그리고 주님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겸손 때문에 반쪽만 먹었지요.
그러나 부끄러운 체험 덕분에 제가 얻은 더 큰 것은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에 비해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얼마나 작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난의 사랑을 Passion이라고 하지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Compassion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저의 작은 Compassion이지만
주님의 그 크신 Passion에 동참하고 동감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마치는 것이 죄송하지만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이지만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는 병아리처럼
주님의 따듯한 사랑에 감사드리는 성 토요일입니다.
어제 성 금요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저는 오래간만에 양성 수도원,
특히 수련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우리만을 위한 전례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3시간에 걸쳐
아주 의미 있고 풍성하게 드렸고,
십자가의 길은 수도원이 아닌 밖에 나가서 6시간에 걸쳐 하였습니다.
어제 아침 키레네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었는데
나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까 고민을 하였지요.
고민고민하다가 저는 두 가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마음고생에 동참하고
12시부터 3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몸 고생에 동참하기로.
마음고생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까지 겪으신 것들,
겟세마니에서의 그 마음의 번민, 다시 말해서
수난을 피하고픈 마음과 감당해야 하는 것 사이의 번민,
감당해야 할 수난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이나 유대인들의 조롱으로 인한 수치심,
10처에서 옷 벗김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욕을 당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한 저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전역에 가서 구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 금요일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저는 새터민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도 구걸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후원회원들이 보내 주시는 것으로 편히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수치를 당해 얻은 것을 조금이나마 장학금에 보태고 싶었지요.
그러나 막상 구걸을 하며 수치 당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두렵고 떨려
대전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나오는 첫 사람에게 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대 남자였는데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 차디찬 무시를 경험하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져서
거의 1시간을 도움을 청하려다 그만 두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또 청하니 이번에는 “에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겟세마니의 주님처럼
그만 두고픈 마음과 한 사람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그 두 마음 사이에서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두 번 밖에 구걸을 못하고 12시가 되어 역을 떠났습니다.
이어진 몸 고생은 마라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번민만 하고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저는 보상심리로 혹독하게 몸 고생을 시키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2시간을 달리고 중간 중간 1시간은 걸었습니다.
아침, 점심을 굶고 3시간을 달리니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길 것이 못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몸을 학대하다시피 했는데도 마음은 찜찜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확실히 수치와 모욕의 고통이
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견디기도 힘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의 가난이 절실하거나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다면
저도 수치와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하지도 주님과 새터민을 너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민만 많이 했지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모욕과 수치를 당함,
이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제 사랑의 정도입니다.
그래도 제가 위안 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수치와 모욕을 제가 당하였고,
구걸도 많이 하였다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실패 덕분에 저는 겸손할 수 있었고
주님의 실패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해 빵 두 개만 가지고 섬에 들어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끝나갈 때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에
빵 두 개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완전 단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주님과 똑같이 완전한 단식을 하였다는 자만감과 허영에 빠질까봐
그리고 주님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겸손 때문에 반쪽만 먹었지요.
그러나 부끄러운 체험 덕분에 제가 얻은 더 큰 것은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에 비해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얼마나 작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난의 사랑을 Passion이라고 하지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Compassion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저의 작은 Compassion이지만
주님의 그 크신 Passion에 동참하고 동감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마치는 것이 죄송하지만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이지만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는 병아리처럼
주님의 따듯한 사랑에 감사드리는 성 토요일입니다.
오늘 특히 제 가슴에 와 닿는 묵상이 됐습니다.
수난당하시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십자가의 고통이 잠시 사라지셨을거예요 !
거룩하신 수난의 사랑을 실감나게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핑그르르~
정말 멋진 부활 선물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