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연중 제 30 주일의 주제는 겸손과 기도입니다.
기도는 겸손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교만한 사람이 절대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도 분명하지요.
자기 주먹을 더 믿는 사람이 하느님께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가 하느님께 무엇을 한다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혼잣말을 하거나 자기 자랑을 하겠지요.
그런데 자기 자랑을 한다면 다른 인간한테 하지 어디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께 하다니 옆에서 보는 제가 너무도 민망스럽습니다.
만일 저의 형이 훌륭한 신학자 앞에서 신학에 대해서 떠들고
저의 누이가 성자 앞에서 자기의 선행을 얘기한다면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건데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가 바로 그랬습니다. 자랑할 데가 없었던 겁니다.
다른 인간은 발톱의 때만도 여기지 않았기에 자랑할 수가 없었고
자기처럼 깨끗한 사람이 더러운 죄인에게 자랑할 순 더더욱 없었던 겁니다.
자랑이란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너무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히 자랑할 수 없고
내게 형편없이 못 미치는 사람에게도 자존심 상해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는 자신이 한 편으로는 다른 인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느님과 비슷하고 어울리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태도와 독백에서 이것이 잘 드러나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꼿꼿이 서서”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어도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아주 교만한 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교만이 모든 죄의 뿌리로서 온갖 단절을 가져오는데
바리사이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단절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은총으로 다가오시는데
그는 은총을 구하지 않기에 단절되는 것이고
인간에게 하느님은 용서로 다가오시는데
그는 죄인이 아니라 하기에 용서코자 해도 용서할 수 없어 단절되는 겁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죽을죄를 지었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고 자비를 구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자비를 구하자마자 즉시 자비를 베푸십니다.
마치 물꼬를 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이 흘러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히 내리고
죄에도 불구하고, 아니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인간은 사랑을 교환합니다.
교만은 하느님과 단절될 뿐 아니라 다른 인간과도 또한 단절됩니다.
교만의 또 다른 특징이 무시, 업신여김이기 때문입니다.
무시無視라는 한자어를 풀이해보면 시력이 없다는 뜻도 있고
엄연히 자기 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없다고 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업신여김도 “없다고 여김”의 준말이지요.
이렇게 없다고 여기니 소통이란 아예 있을 수 없겠지요.
교만한 사람은 이렇게 남을 무시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 사람인데
세리가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지만
사실은 바리사이가 참으로 외롭고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이지요.
그의 주변에는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아무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수평적 소통과 수직적 소통이 모두 단절된 아주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토록 교만은 사랑의 소통을 뿌리로부터 불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기도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를 하려고 부단히 애 쓰기에 앞 서
죄스러운 존재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의 명심하게 되는 오늘입니다.
기도는 다름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있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