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이 전반적으로 그러하지만
제자들의 부활 체험 기사도 다른 복음에 비해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사실과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전해 듣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는 얘기를 군더더기 없이 짧게 전합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간단할 뿐 아니라 이상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얘기뿐이고
다른 복음들처럼 믿게 되었다는 얘기는 없으며,
믿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나 민족에게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차원과
이렇게 믿지 못하는데도 인간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의 차원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 때문에 매우 슬퍼하는데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얘기를 듣고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것 때문에 슬퍼한다면
살아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기뻐하지 않음은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않음은 마음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완고한 것은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완고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상황에서는 믿기지 않습니다.
너무 기쁜 일이 생기면 생시가 아니고 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인가 생시인가” 말하기도 하고
살을 꼬집어보기도 합니다.
부정과 불행 의식의 고착화.
이것이 우리 마음의 완고함입니다.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안 좋은 일만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불행의 연속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우리가 은총의 존재라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오래된 불행 의식만큼 그래서 불행 의식이 고착화된 만큼
믿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우리에게도 사명을 맡기십니다.
지금 믿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믿게 될 것이라고 믿고 맡기시는 겁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믿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믿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희망을 끄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하고
지금은 그럴 거라고 믿지 못하지만
언젠가 복음을 선포하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이 제자들의 믿지 못함을 그렇게 강조함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나중에 복음 선포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지금은 믿지 못하지만 언제가 복음을 선포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오늘 생각해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이 전반적으로 그러하지만
제자들의 부활 체험 기사도 다른 복음에 비해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사실과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전해 듣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는 얘기를 군더더기 없이 짧게 전합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간단할 뿐 아니라 이상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얘기뿐이고
다른 복음들처럼 믿게 되었다는 얘기는 없으며,
믿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나 민족에게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차원과
이렇게 믿지 못하는데도 인간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의 차원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 때문에 매우 슬퍼하는데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얘기를 듣고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것 때문에 슬퍼한다면
살아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기뻐하지 않음은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않음은 마음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완고한 것은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완고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상황에서는 믿기지 않습니다.
너무 기쁜 일이 생기면 생시가 아니고 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인가 생시인가” 말하기도 하고
살을 꼬집어보기도 합니다.
부정과 불행 의식의 고착화.
이것이 우리 마음의 완고함입니다.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안 좋은 일만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불행의 연속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우리가 은총의 존재라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오래된 불행 의식만큼 그래서 불행 의식이 고착화된 만큼
믿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우리에게도 사명을 맡기십니다.
지금 믿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믿게 될 것이라고 믿고 맡기시는 겁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믿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믿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희망을 끄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하고
지금은 그럴 거라고 믿지 못하지만
언젠가 복음을 선포하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이 제자들의 믿지 못함을 그렇게 강조함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나중에 복음 선포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지금은 믿지 못하지만 언제가 복음을 선포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오늘 생각해봅니다.
주님만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근원이요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분으로 부터 온 것이며 그분만이 주실 수 있고,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믿음을 취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