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릴 때면 영성체 때마다 해설자가 말합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만 성체를 영하시겠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을 얘기한다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본인이 간절히 원한다면 성체를 영하게 하고 싶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인 줄 모르고 영하는 것이
성체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에 반대합니다.
모독하기 위해 일부로 영하는 거라면
그것이 그저 밀떡이 아니라 성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독하기 위해 일부로 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체가 아니기에
모독이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쥐가 성체를 먹으면 빵을 먹는 것이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성체인줄 모르면서 굳이 영할 필요도 없지만
성체인 줄 알면서도 모독하기 위해 일부러 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체를 영하는 것이 상관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에게 성체를 영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의 할례 받은 신자들은 참으로 속이 좁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로 베드로 사도에게 시비를 겁니다.
하나는 어떻게 속된 음식을 이방인들과 먹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 했냐는 겁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아주 적절한 답을 합니다.
음식이건 사람이건 인간적으로 구별이나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먼저 어떤 음식을 더럽다고 또는 속되다고 하지 말랍니다.
이유는 단 한가집니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아무 것도 더럽지도 속되지도 않다는 거지요.
어렸을 때 푸닥거리를 하고 난 음식은 왠지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먹을 것 없어 배고픈데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오늘 가르침을 따라 저는 성과 속을 구분하는 저를 깨기 위해서
여전히 기분은 찜찜하였지만 일부러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음으로 속된 음식을 먹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랍니다.
성령께서 똑같이 내리셨고
성령께서 똑같은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이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은 비와 빛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눈이 멀어서
사람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데
할례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가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고, 그럼으로써
구별이 차별로 이어지는 인간의 그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환자를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피할 수 없는 외길l에서 나환자와 마주치게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니 용기가 생겨 나환자와 포옹할 수 있었고,
포옹을 하고 나니 그 나환자가 곧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구별이 사라지는 거기에 그리스도가 발생하고
차별이 사라지는 거기에 성령의 참 사랑이 자리합니다.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릴 때면 영성체 때마다 해설자가 말합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만 성체를 영하시겠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을 얘기한다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본인이 간절히 원한다면 성체를 영하게 하고 싶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인 줄 모르고 영하는 것이
성체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에 반대합니다.
모독하기 위해 일부로 영하는 거라면
그것이 그저 밀떡이 아니라 성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독하기 위해 일부로 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체가 아니기에
모독이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쥐가 성체를 먹으면 빵을 먹는 것이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성체인줄 모르면서 굳이 영할 필요도 없지만
성체인 줄 알면서도 모독하기 위해 일부러 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체를 영하는 것이 상관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에게 성체를 영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의 할례 받은 신자들은 참으로 속이 좁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로 베드로 사도에게 시비를 겁니다.
하나는 어떻게 속된 음식을 이방인들과 먹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 했냐는 겁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아주 적절한 답을 합니다.
음식이건 사람이건 인간적으로 구별이나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먼저 어떤 음식을 더럽다고 또는 속되다고 하지 말랍니다.
이유는 단 한가집니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아무 것도 더럽지도 속되지도 않다는 거지요.
어렸을 때 푸닥거리를 하고 난 음식은 왠지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먹을 것 없어 배고픈데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오늘 가르침을 따라 저는 성과 속을 구분하는 저를 깨기 위해서
여전히 기분은 찜찜하였지만 일부러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음으로 속된 음식을 먹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랍니다.
성령께서 똑같이 내리셨고
성령께서 똑같은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이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은 비와 빛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눈이 멀어서
사람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데
할례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가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고, 그럼으로써
구별이 차별로 이어지는 인간의 그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환자를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피할 수 없는 외길l에서 나환자와 마주치게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니 용기가 생겨 나환자와 포옹할 수 있었고,
포옹을 하고 나니 그 나환자가 곧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구별이 사라지는 거기에 그리스도가 발생하고
차별이 사라지는 거기에 성령의 참 사랑이 자리합니다.
사람이 어찌 돼지 창자를 먹느냐며.
자존심이 상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어찌하오리까?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