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제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까지 털며
자기가 코린토에서 할 바를 다 했다고 사람들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만류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잠자코 있지도 말고 계속 말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한 인간으로서 할 말은 다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나의 말은 남았으니 이제 나의 말을 하라고 하시고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강아지라도 말을 해야 하니
하던 말을 계속 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정말 두려워서 말을 그만 두었단 말입니까?
바오로 사도도 우리처럼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겐 크나큰 위안이 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서
그렇게 담대하게 말씀을 전한 줄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반대를 두려워하고
비난을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에게도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도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한 것이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두려움 가운데서도 그리 담대하게 전한 것이라면
우리도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말씀을 담대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우리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꾸지람 들을 때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들으면 덜 창피합니다.
캄캄한 밤 어디를 갈 때 옆에 어린애라도 있으면 덜 떨립니다.
그러니 상당수의 두려움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걸 나 홀로 맞이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제가 대전역에서 구걸할 때 누가 옆에 있었다면
퇴짜와 멸시 받는 걸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생각하였지요.
다음에는 우리 한우리 회원들과 아예 준비하고 나와서
정식으로 모금 활동을 해야겠다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바오로 사도에게
당신이 친히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옆에 있는 것으로도 힘이 되겠지만
내가 친히 너와 함께 있으니 더더욱 힘이 될 것이고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 두려움의 속 내용은 하느님 없는 두려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고 그 두려워하던 바다에 빠졌는데
사실은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봤기 때문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두려움도 비난이나 실패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함께 담대히
하루를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제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까지 털며
자기가 코린토에서 할 바를 다 했다고 사람들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만류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잠자코 있지도 말고 계속 말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한 인간으로서 할 말은 다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나의 말은 남았으니 이제 나의 말을 하라고 하시고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강아지라도 말을 해야 하니
하던 말을 계속 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정말 두려워서 말을 그만 두었단 말입니까?
바오로 사도도 우리처럼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겐 크나큰 위안이 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서
그렇게 담대하게 말씀을 전한 줄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반대를 두려워하고
비난을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에게도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도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한 것이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두려움 가운데서도 그리 담대하게 전한 것이라면
우리도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말씀을 담대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우리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꾸지람 들을 때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들으면 덜 창피합니다.
캄캄한 밤 어디를 갈 때 옆에 어린애라도 있으면 덜 떨립니다.
그러니 상당수의 두려움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걸 나 홀로 맞이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제가 대전역에서 구걸할 때 누가 옆에 있었다면
퇴짜와 멸시 받는 걸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생각하였지요.
다음에는 우리 한우리 회원들과 아예 준비하고 나와서
정식으로 모금 활동을 해야겠다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바오로 사도에게
당신이 친히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옆에 있는 것으로도 힘이 되겠지만
내가 친히 너와 함께 있으니 더더욱 힘이 될 것이고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 두려움의 속 내용은 하느님 없는 두려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고 그 두려워하던 바다에 빠졌는데
사실은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봤기 때문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두려움도 비난이나 실패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함께 담대히
하루를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가끔씩 망각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늘 함께 해 주시는 우리 주님만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