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부처가 집착하게 하면 부처를 죽여 버리고
불경이 집착하게 하면 불경을 불에 태워버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집착은 어떤 집착도 나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집착으로 모든 것을 못 보게 하는 부처는 부처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집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 집착이 있고
하늘 집착이 있습니다.
땅 집착은
땅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 살려는 것이요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온통 관심을 쏟는 것이며
지상의 것들로 만족을 하려는 것이요
지상의 행복과 Utopia를 꿈꾸기에 하늘을 못보고 놓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 집착은
하늘만 쳐다보고
세상사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이요
하늘 일만 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만 섬기느라 부모, 형제, 자식을 팽개치는 것이요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 저 하늘에서나 이룩되는 나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천사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 얘기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이 직접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마치시며 이제는
당신처럼 제자들이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연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간적으로는 여기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집니다.
지금과 영원의 단절이 있고
땅과 하늘의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영원은 영원한 현재, 영원한 지금이 아니고 뭣이고
여기는 하느님 나라의 한 곳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되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고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건설합니까?
무조건 세례자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면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기적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병자를 고쳐주어
병고가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능력을 은총으로 주셔서 기적을 행하게 된다면
이것도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마귀를 물리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갖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득실 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능력 보이시기를 포기하고 돌아가시자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정작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의 은사로
제자들이 깨닫고 믿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처럼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 덕분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하느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지 알므로
깨닫고 믿는 사람이
먼저 깨닫고 믿은 제자들에 의해 늘어가면서부터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치유의 기도회나 유명한 강사의 강의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그 제자들과 군중들과 같고
오늘 사도행전의 하늘만 쳐다보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를 바라보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내가 만난 그분을 선포합니다.
부처가 집착하게 하면 부처를 죽여 버리고
불경이 집착하게 하면 불경을 불에 태워버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집착은 어떤 집착도 나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집착으로 모든 것을 못 보게 하는 부처는 부처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집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 집착이 있고
하늘 집착이 있습니다.
땅 집착은
땅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 살려는 것이요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온통 관심을 쏟는 것이며
지상의 것들로 만족을 하려는 것이요
지상의 행복과 Utopia를 꿈꾸기에 하늘을 못보고 놓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 집착은
하늘만 쳐다보고
세상사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이요
하늘 일만 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만 섬기느라 부모, 형제, 자식을 팽개치는 것이요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 저 하늘에서나 이룩되는 나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천사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 얘기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이 직접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마치시며 이제는
당신처럼 제자들이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연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간적으로는 여기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집니다.
지금과 영원의 단절이 있고
땅과 하늘의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영원은 영원한 현재, 영원한 지금이 아니고 뭣이고
여기는 하느님 나라의 한 곳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되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고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건설합니까?
무조건 세례자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면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기적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병자를 고쳐주어
병고가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능력을 은총으로 주셔서 기적을 행하게 된다면
이것도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마귀를 물리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갖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득실 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능력 보이시기를 포기하고 돌아가시자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정작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의 은사로
제자들이 깨닫고 믿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처럼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 덕분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하느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지 알므로
깨닫고 믿는 사람이
먼저 깨닫고 믿은 제자들에 의해 늘어가면서부터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치유의 기도회나 유명한 강사의 강의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그 제자들과 군중들과 같고
오늘 사도행전의 하늘만 쳐다보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를 바라보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내가 만난 그분을 선포합니다.
지금 여기를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나에게 주어지고 해야 할 일들이
바로 하느님나라 건설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