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을 하다 보니 문득 김동환 시에 임원식이 곡을 붙인
“아무도 모르라고”라는 노래가 생각이 나 흥얼거렸습니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 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그런데 오늘 복음의 뭣이 이 시를 문득 생각나게 했을까요?
사실 이 시와 오늘 복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과 이 시를 연결시킨 것은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샘물이 있다는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인류의 구원자가 잉태되는 엄청난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약혼자 요셉은 처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나라 왕비가 왕손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우리나라 언론과 방송이 떠들썩하게 떠드는 것을 보고
그리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세상에서는 왕족이 태어나는 것이 그리 대단하고,
그래서 왕비가 임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 떠들썩한데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고 주인이신 분께서 잉태되시는 것은
그러나 너무도 조용히 진행되고 그래서 아무도 모릅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이렇게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허세와 사랑의 차이가 아닐까요?
사랑은 작을수록 허세가 부족을 메우는 법이고,
사랑은 클수록 사랑 아닌 다른 것이 있을 자리가 없는 법이지요.
사랑이 완전하고 순수하다면 왜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까?
이렇게 볼 때 가난이란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일까요?
가난할 때 사랑이 더 진실합니다.
가난이 사랑마저 파탄 나게도 하지만
사랑이 가난보다 더 크기만 하다면 가난할수록 사랑은 더 진실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에 대해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직 믿기지 않지만 자기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소중히 사랑하기로 합니다.
주어진 생명을 단지 소중히 할 뿐 아니라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조용한 받아들임 안에 그 엄청난 구원이 잉태되고 시작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그 어떤 전율이 찌릿하고 제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용한 가운데 제 안에서 일어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