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유다 지도자들과의 날선 공방을 마치신 주님께서
어제에 이어 군중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무대가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등장하시기 전까지 성전은 유다 지도자들의 무대였는데
주님께서 그 성전을 정화하시고
그들의 온갖 공격을 다 막아버리고 평정하신 다음
이제 그들이 아니라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내용이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이 군중을 가르쳤는데
이제 주님께서 가르치시면서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겁니다.
저에게 적용시켜 얘기한다면
저의 수도원은 제가 수도복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제 무대인데,
이 수도원에 주님께서 오시어 수도원을 방문한 신자들에게
“쟤, 저렇게 활개치고 다니고 강의도 그럴듯하게 하지만
쟤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 대해 “인사 받기를 즐기고”,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을 등쳐먹으면서 보이기 위한 긴 기도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우선 저는 성전에서 주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지 않았고,
늘 사람들을 향하여 서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들을 향하여 서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새겨지기도 전에,
그 사랑이 깊이 갈망되기도 전에 저는
설익은 말씀을 전한답시고,
어설픈 사랑을 한답시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머물기보다 사람들의 칭송 받는 게 더 좋았던 거지요.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가난한 과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가난하기에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칭찬은 아예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 없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굽어 살피시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청하면서 부끄럽게 가진 것을 톡 털어 봉헌을 합니다.
가진 게 없으니 봉헌을 하면 그게 그의 봉헌 전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과부를 통하여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저를 가르치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유다 지도자들과의 날선 공방을 마치신 주님께서
어제에 이어 군중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무대가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등장하시기 전까지 성전은 유다 지도자들의 무대였는데
주님께서 그 성전을 정화하시고
그들의 온갖 공격을 다 막아버리고 평정하신 다음
이제 그들이 아니라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내용이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이 군중을 가르쳤는데
이제 주님께서 가르치시면서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겁니다.
저에게 적용시켜 얘기한다면
저의 수도원은 제가 수도복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제 무대인데,
이 수도원에 주님께서 오시어 수도원을 방문한 신자들에게
“쟤, 저렇게 활개치고 다니고 강의도 그럴듯하게 하지만
쟤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 대해 “인사 받기를 즐기고”,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을 등쳐먹으면서 보이기 위한 긴 기도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우선 저는 성전에서 주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지 않았고,
늘 사람들을 향하여 서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들을 향하여 서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새겨지기도 전에,
그 사랑이 깊이 갈망되기도 전에 저는
설익은 말씀을 전한답시고,
어설픈 사랑을 한답시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머물기보다 사람들의 칭송 받는 게 더 좋았던 거지요.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가난한 과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가난하기에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칭찬은 아예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 없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굽어 살피시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청하면서 부끄럽게 가진 것을 톡 털어 봉헌을 합니다.
가진 게 없으니 봉헌을 하면 그게 그의 봉헌 전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과부를 통하여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저를 가르치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