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신 얘기입니다.
이 복음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읽고 묵상한 얘긴데
군중을 보고 주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이
군중이 며칠 동안 굶주렸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세히 보니 가엾은 마음이 드신 이유가 그게 아니었습니다.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많은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양들에게 목자가 없으면 정말로 가여울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굶어 죽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굶주린 군중을 걱정하시며 먹을 것을 해결해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더 가엾게 생각하시고 걱정하신 것은
군중이 배를 굶주린 것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먼저 하신 것이 배부르게 하신 게 아니라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고 하는데 무엇을 가르쳐주셨을까요?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주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세를 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을까요?
제가 주님일지라도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오셨겠습니까?
설마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하신 뒤 사람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도망친 주님께서는
이어서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한 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토록 길게 생명의 빵에 대해서 가르쳐주셨는데,
길게 가르치신 것은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셨단 뜻인데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간단히 일소하고 가버립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너희도 떠나겠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지요.
수련자들을 가르치는 제가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수련자들을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고 모나지 않은 보통 사람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양성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으로는 좀 부족해도
하느님 체험을 더 제대로 하는 형제로 양성할 것인가 자주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것은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깊이 알고,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잘난 사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제가 만나는 어른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나이가 더 드신 분일수록
자식들에 대해 걱정하시고,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성당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리 걱정하시는 어른들도 젊었을 때는 그 자식과 마찬가지였었겠지요.
그런데 세상을 많이 살고 보니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사는 한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람답게 처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더 중요하고, 제일 중요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고,
그것을 모르고 삶을 표류하는 것이 너무도 가엾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여운 사람인가, 행복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