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애쓰고 있는 것을 이미 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가지 않으시고 애를 더 먹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떨어져서도 제자들이 씨름하는 것을 보셨다는 말인가?
주님께서는 애를 먹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도 바로 가지 않으셨다는 건가?
마르코복음은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과 달리 기도하는 중에
멀리 호수 한 가운데서 바람과 씨름하는 제자들을 보셨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산 위에서 기도하셨기에 멀리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얘긴데,
어쩌면 이미 어두워졌을 저녁에,
그것도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어찌 보셨을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셨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역경을 주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다는 뜻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우리 인생길에도 언젠가 적어도 한 번은
나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정도의 역경이 누구에게나 닥칠 것입니다.
이렇게 역경 중에 있을 때 우리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 주님께 매달리지만
주님도 안 계시거나 외면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역경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
오늘 마르코복음에서 <보시고>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보시고 바로 구해주시지 않고 새벽까지 기다리셨을까요?
아니,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혹시 방치하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구원의지와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포기나 방치를 하신 것이 아니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시고, 언제까지 기다리신 것입니까?
해가 지고 달이 뜨기를 기다리신 것이고,
달마저 보름달에서 그믐달이 되기를 기다리신 것이며,
그 그믐달마저 가장 어두워지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왜냐면 어둠이 가장 깊어지는 때가 빛을 가장 갈망하는 때이고,
빛을 가장 갈망할 때가 빛이 나타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가 빛이신 주님을 찾아온 것은
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밤이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 빛을 찾아가야겠다는 갈망이 그들 안에 생기고,
갈망이 열망이 되어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새벽에 이뤄지지만
구원의 갈망은 초저녁에 싹이 터 밤새 자라는 겁니다.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나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끊어지고,
내 힘이 다하여 더 이상 어둔 밤을 헤쳐 나가는 것을 포기할 때,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나의 주님이고 구원자이실 때,
그때에야 주님이 진정한 나의 구원자 되시기에
그때에야 주님께서는 나의 구원자로 오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공동으로 체험합니다.
저의 수련소 공동체도 이런 구원체험을 공동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 새벽 저도 갈망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