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풀이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비유뿐이고
뒤에 나오는 풀이는 복음사가 마르코가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씨는 말씀이라는 전제하에서 비유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아주 다르게 풀이하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씨를 무엇으로 달리 이해할 수도 있을까요?
저는 씨를 사랑이라고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니까 씨뿌리는 사람은 하느님이시고
씨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길바닥 같은 우리에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길바닥이란 과연 어떤 곳입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길바닥 같다면
분주히 오가는 많은 사람들로 내 마음은 차 있고,
내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사랑은
수많은 사람에게 짓밟히거나 그 중 어느 누가 채갈 것입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에 내 마음이 빼앗길 때
하느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많이 내게 쏟아 부으셔도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흘려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수정과를 주시는데
우리는 아이처럼 콜라를 더 좋아해서 수정과는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요?
돌밭이란 돌과 흙이 섞여있는 밭이지요.
그러니까 내 마음이 돌밭과 같다는 것은
내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돌과 같은 마음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흙과 같은 마음이 같이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돌과 같은 마음이란 쓰디쓴 사랑은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이고,
흙과 같은 마음이란 다디단 사랑만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그것은 치유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받아들이지만
병을 통해 치유해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죠.
이것을 묵상하다 요즘 이빨이 아픈 저에게 적용을 해봤습니다.
지금 제가 이빨이 아픈 것은 저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나이 먹어서 아픈 것이거나 관리를 잘 못해 아픈 것일 수도 있지만
이것을 저는 하느님 사랑과 떼어서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없애달라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계속 그 고통을 주신 것을
교만치 말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시덤불에 뿌려졌다는 것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우리의 욕망에 하느님의 사랑이 숨 막히는 거로 이해해봤습니다.
숨 막히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우리 욕망 때문에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좋기는 하지만 나의 욕망이 더 강렬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충만도 크지만 욕망의 허무감이 더 처절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평안도 좋지만 욕망의 근심걱정이 더 나를 뒤흔듭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코자 하시는 것은
결국은 하느님의 사랑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길바닥 같고, 돌밭 같고, 가시덤불 같아도
하느님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끊기지 않고 계속 부어지면
마치 세월이 가면 돌도 부서지고 가시덤불도 말라죽듯이
우리의 마음 밭도 차츰 좋아져 하느님 사랑을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 날을 희망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