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언급하십니다.
앞서 당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비밀에 부치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이제 제자들에게만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에게만은 비밀을 해제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가르치심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자들의 몰이해가 주님의 가르치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르코복음은 다른 복음에 없는 말, 곧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를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는 뜻은
두루뭉술하게나 흐릿하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또렷하게 하셨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은 결과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선택적 무지> 또는 <선택적 몰이해>라고 부르겠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수난과 죽음은 No이고, 부활은 Yes이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싫은 것은 안 듣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해하고픈 것만 이해하고 다른 것은 몰이해하는 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 이렇지 않지요.
사랑할수록 너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네가 얘기하는 것을 잘 듣고 얘기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 사랑이 없으면 선택적 무지와 몰이해가 있고
사랑이 없을수록 최소한으로 이해하고 아무런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 것인가요?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거나 거짓 사랑인 건가요?
사랑이 아니라고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나
참 사랑이라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서툴고 어리석은 우리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좋은 것만 있고,
나쁜 것이라고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우리 사랑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베드로를 흉보거나 나무랄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베드로의 사랑을 몰라주고
사탄이라고 몰아치는 주님이 너무 매몰차다고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가려면 이렇게 매몰차게 사랑을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난과 죽음이 없으면 부활에 이르는 길이 없으니 매몰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일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당신이 먼저 이 길을 가야지만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에게나 우리에게나
서툴고 어리석은 사랑에 이제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당신처럼 매몰찬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