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나서는 니네베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자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셨다고 전합니다.
인간의 돌아섬이 하느님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돌아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은 올바른 돌아섬이 그 하나이고,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잘못된 돌아섬이 다른 하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구약의 두 인물, 요나와 솔로몬과 비교하시며
당신은 이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시고
당신이 보여주실 하늘의 표징은 요나의 표징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솔로몬과 요나가 바로 돌아선 사람들의 대표로서
하나는 올바로 돌아선 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 돌아선 이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선 이, 곧 잘못 돌아선 이입니다.
젊은 나이에 임금이 됐을 때 그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하느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찌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게 되었습니까?
남 탓을 하자면 시바의 여왕이 다녀간 다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에게 값진 물건들을 선물했을 뿐 아니라
온갖 듣기 좋은 말로 솔로몬을 기쁘게 함으로써
이때부터 솔로몬은 이민족의 다른 여자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세상을 쫓아가게 하는 것은
이처럼 세상의 부귀영화와 이 세상의 듣기 좋은 말들입니다.
사실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꾀는 사람도 없고
듣기 싫은 말에 넘어가 하느님을 떠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에 비해 요나는 하느님께로부터 도망쳤지만
하느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시련을 주신 다음
하느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서 돌아선 이입니다.
그러니 그가 니네베 사람들을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한
대단한 회개의 선포자이긴 하지만 스스로 회개한 자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서 나에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라고 하듯이
하느님께서 요나를 회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 피해 다니던 나병환자를 통해
주님께서 프란치스코를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하신 것처럼
니네베의 회개선포가 너무도 싫어 피해 도망치는 요나를
하느님께서는 죽다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 돌아서게 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달콤함과 온갖 만족을 우리는 스스로 끊지 못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싫어하는 고통을 통해 회개케 하십니다.
이는 마치 아이의 젖 떼는 과정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맛있게 먹던 엄마의 젖을 아이가 스스로 떼고
한 번도 먹은 적 없는 거친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지요.
그때 엄마는 쓴 약을 젖에 발라 그 좋아하던 젖을 싫게 만듦으로
싫어하던 거친 음식을 먹기 시작하게 하고 차츰 맛들이게 하지요.
싫어하는 것을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해서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서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을 맛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에게 나병환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통이란 쓴 것은 달게 하고, 단 것은 쓰게 하는 회개의 묘약입니다.
하여, 회개의 묘약인 고통을 우리 스스로 달라고 하지는 못할지라도
주시는 고통을 원망은 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용기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