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왜 나를 사랑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저를 진짜 미워했을까요?
아니 정말로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저는 저를 제일 사랑했고 그래서 제일 미워했던 것뿐입니다.
저를 사랑했기에 제가 더 훌륭한 저이기를 바랐던 것이고,
더 훌륭한 나이기를 바랐던 거기에서 조금 삐끗하는 바람에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훌륭하기를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입니다.
사랑하기에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잖아요?
전혀 사랑치 않는 남의 집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고,
너무도 사랑하기에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남의 자식인데도 잘 되길 바란다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잘못 삐끗하면 욕심이 됩니다.
사랑과 욕심의 차이는 자유와 집착의 차이입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바라고 욕심은 바라는 것에 집착합니다.
사랑이 가난하면 바라는 것을 자유로이 추구하지만
사랑이 가난치 못하여 욕심으로 바뀌면
바라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이 욕심이 되어 미움이 내 안에 똬리를 틀게 되면
내 안의 미움이 온갖 분탕질을 합니다.
먼저 내 안의 미움이 하느님의 사랑을 차단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내 안의 미움이 하느님의 사랑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할 텐데 말입니다.
이제 와서 점점 더 확신하는 것은
나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같이 간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 거지요.
나에 대한 참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같은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내 안의 미움은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내 안의 미움은 마치 색안경과 같아서 모든 사람을 미움으로 보게 합니다.
어쩌면 자기에게 향하는 미움의 화살을 밖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를 찌르는 미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심사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그 중심에
참 자기 사랑이 있음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