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에서는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선포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마지막이라는 느낌보다는 처음, 시작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갈릴래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대신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만날 것(마태 28,7)이라고 듣게 됩니다. 그 후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갈릴래아에서 만날 것(28,10)을 약속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떠나게 됩니다.
갈릴래아.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곳은, 태어나신 베들레헴도 아니고, 어렸을 때 사셨던 나자렛도 아니고, 갈릴래아였습니다. (4,12-17) 오늘 복음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장소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은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에서도 부활과 승천 이야기가 다루어지지만, 이 모든 것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마태오가 갈릴래아를 언급한 이유는 마태오만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28,20) 마태오 복음의 이 마지막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1,23) 그리고 복음은 친절하게도 임마누엘의 뜻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보았을 떄,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승천. 지금의 우리에게 주님의 승천은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 당시 사도들에게 주님의 승천은 또 하나의 두려움, 또 하나의 긴장감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수난 이후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잠그고 숨어 지냈습니다. (요한 20,19)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의 죽음은 큰 상실감을 가져왔을 것이고, 그 죽음이 또한 자신들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언젠가는 떠날 것임을 이야기 하시면서, 제자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요한 14,18)
스승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 부활에 대한 놀라움, 부활의 기쁨에 머물 여유도 없이 또 다시 제자들을 떠나시는 스승에 대한 아쉬움, 혹은 버려진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
하지만 마태오는 시작을 가리키면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도전을 의도했을 것입니다. 목자를 잃은 양들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함께 하지 않는,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마태오 복음이 오늘의 말씀으로 끝날지라도, 복음의 선포는, 복음을 살아가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배워왔다면, 예수님게서 하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하나 실천해 보고, 하나하나 우리의 삶으로 옮겨 볼 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느님을 힘입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 기쁨을 살아가고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나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