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복음,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복음에서
베드로사도는 주님의 정체를 옳게 대답을 함으로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사도가 순식간에 사탄이 되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사도는 정말 사탄인 것인가요?
사탄이 어떻게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 주님 교회의 반석이 어떻게 하다가 사탄이 되었습니까?
주님을 지지하던 그가 어떻게 반대쪽으로 돌아서고,
주님을 사랑하던 그가 어찌 미워하게 된 것인가요?
베드로사도는 정말 주님을 미워하는 사탄이었나요?
아닙니다. 베드로사도는 전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사도는 사랑하는 사탄인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탄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탄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적극적으로 미워하거나
주님께서 무엇을 하시건, 어찌 되시건 무관심한 그런 사탄과는 달리
주님을 너무도 사랑하여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쌍수를 들고 반대합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까지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사도 어찌 반대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는 까짓 마라톤도 뛰지 말라고 하시는데
고난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 거라고 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물론 베드로사도도 반대치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아주 매몰차게 나무라셔야만 합니다.
실제로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그런 매몰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 예수를 성전에서 잃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께서 나무라시자
어린 예수는 아주 당돌하고 매몰차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어머니 마리아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습니까?
부모를 놔두고 “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늘 이렇게 단호하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거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막으면 늘 이렇게 단호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가는 걸 막으면 단칼에 자르라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이런 주님이시기에 그 사랑을 아셔도 단호하게 말씀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베드로사도에게 하신 이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너라는 인간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늘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네가 바로 사탄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치 않는 사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치 않는 진짜 사탄은 아니지만
베드로사도처럼 한 때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잠시 사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베드로사도처럼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못할까요?
그 속 내용을 보면 사실은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사도처럼 하느님은 사랑하지만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이고
부활에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그 깊은 뜻은 생각지 않고
당장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 사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