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가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 받으면 되는 것인가?
그렇게 하고도 나는 구원 받을 수는 있는 것인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런 중요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구원에 대해 무관심하고픈 유혹을 종종 받습니다.
그가 죄를 짓건 말건, 잘못을 고치건 말건 무관심하고픕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한 때는 적극적으로 남의 죄와 잘못을 고쳐주려고 하였습니다.
저도 주제넘게도 남을 고쳐주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했던 적이 있었는데
특히 저희 수도회의 이상과 관련하여 형제들이 충실치 않을 때 그랬습니다.
수련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수도원에 돌아온 저는 군인정신에다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의욕과는 달리 형제들에게는 그런 의지가 없어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 형제들 때문에 저의 가난 실천도 방해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회 될 때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충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련을 들어갈 무렵 제 주변에는 형제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왜 형제들이 저를 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자인지 장자인지의 글을 읽다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상대에게는 칼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우리의 이상대로 잘 살아보자는 좋은 얘기에 왜 형제들이 슬슬 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다가 그 때서야 제가 그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수도원에 일찍 들어와 수도생활은 선배이지만 나이가 어린 제가
대부분 형님들에게 충고를 마구 해대니 형제들은 저를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식으로 피한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저의 회개와
저의 복음적인 성숙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렇게 수련기가 반 쯤 지났을 때부터 형제들이 슬슬 제 곁에 오고
수련이 끝나갈 무렵에는 ‘레오나르도가 수련기 중 제일 많이 변했다.’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제들이 하였습니다.
제가 형제들에게 충고를 한 것은 의욕이 아니라 욕심이었습니다.
욕심은 사랑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겸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저도 잘 못 살면서 나이도 어린 것이 아주 교만하게 충고를 해댄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교만했고 너무도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욕심만 많았지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부족했습니다.
겸손하게 말하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만 충고했다면
형제들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거고, 잘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자세로 잘못 충고하였기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것인데
그 잘못은 고치지 않고 관계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 충고를 포기합니다.
사랑을 포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사랑의 포기는 비단 형제에 대한 사랑의 포기만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거고, 나에 대한 사랑도 포기하는 겁니다.
사랑의 포기는 공멸이고 그래서 제일 나쁜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욕심을 포기해야 되는데 사랑을 포기하고,
교만을 포기해야 하는데 겸손을 포기함으로써 공멸의 길을 갑니다.
충고를 잘 한다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고,
그냥 무관심하고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편한 가운데 서서히 공멸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깊이 묵상하는 주일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