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 하루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다가가야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느 순간 형제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좋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제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을 때, 이것을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저울질하고 있는 모습도 보곤 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하지 않는데, 왜 나는 해야 해? 수도자로서 희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입은 이야기 하지만, 몸이 항상 그것에 똑같이 움직이지는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 좋음에 대해서, 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식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말만 유창하게 하고 있구나...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맏아들인가? 아니면 작은 아들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제 안에 맏아들의 모습도 있고, 작은 아들의 모습도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불만에 툴툴 거리면서도 공동체 일에 몸을 움직이고 있는 제 모습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마지못해 승낙은 했지만, 실천에 있어서 어렵게 어렵게, 겨우 겨우,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제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모습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비판합니다. 요한의 말을 믿지 않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처럼, 우리도 행동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비판합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매번 결심을 하면서도 그 실천이 오래 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도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하기 싫은 부분에 있어서, 나중에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 편안함 때문에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생각을 바꾸어 움직인다면, 그렇게 선을 행한다면, 선을 행함으로 인해 오는 결과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는 똑같이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던, 아니면 나의 모습이던 상관없이, 가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그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주저앉기보다는, 그 순간 조금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그 실천이 점점 우리를 바꾸어 가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위선자가 되지 말자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오히려 매번 편안함이라는 유혹에 빠지면서도, 이번 한 번 만이라도 행동에 옮겨 보자는 그 생각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한 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