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까?”
어떤 율법교사가 한 질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율법교사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 빼고는
질문의 내용도 좋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도 옳습니다.
우선 질문하는 내용이 좋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지 여쭙습니다.
이것은 ‘받는 것’과 ‘얻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영원한 생명은 자기가 얻는 것이라 생각지 않고
받는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는다는 것은 누가 줘야 받는 것인데
주시는 분은 분명 하느님임을 알고 있는 것이며
그분이 주셔야 우리 인간은 받아 가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자세가 마음에 들고
더 젊었을 때와 비교할 때 점차 이런 자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여러모로 어린이가 된다고 하는데
저도 조금은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 수동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경우에는 수동태가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수동태가 될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주도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더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자세도 있는 겁니다.
언제 주시건, 어떻게 주시건, 무엇을 주시건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태도 말입니다.
사실 저는 주십사고 청원기도 할 때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는데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저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것이
주님께서 알아서 가장 좋은 것을 알맞게 주시도록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율법학자는 대답도 옳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사랑인데,
그 사랑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이 율법학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느님만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실상 하느님을 옳게 믿는다고 하는 우리 중에도
사랑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사랑에서 자주 이웃 사랑은 제켜놓곤 합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을 않는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을 옳게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을 절대로 제켜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당신의 자녀 누구도 빠지지 않고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하느님이 사랑하는 그를,
우리의 형제이며 이웃인 그를 사랑치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교사는 알기는 잘 알고 있고 대답도 잘하는데
우쭐대면서 대답하는 것이 제 눈에 꽤 거슬립니다.
주님께서도 그러셨는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알기만 하지 말고,
아니 아는 체만 하지 말고 아는 대로 실천하라고
제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늘 저는 알아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