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는 이런 말씀이 선포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여라.”
그런데 우리는 이런 반문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길이신데 무슨 주님의 길을 또 내라는 것인지?
당신 가실 길을 스스로 마련치 못해 우리가 마련해드려야 한다는 말인지?
통미봉남이란 신조어가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과는 통하고 남한과 통하는 길은 봉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통미봉북을 하고 있지요.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고 함은 이런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통하는 길은 열려 있는데
주님과 통하는 길은 닫혀 있다면 이 길을 여는 것 말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 때문에 화가 나
자기들의 마을로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반대하였지요.
우리도 종종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주님이 오실 길을 일부로 막는 분은 없겠지만
부지불식간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막는 경우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길이란 누구와 누구가 통하는 길이기도 하고
서로 오가면서 생기는 것이 길이기도 하기에
내가 주님과는 잘 통하지 않고 친구와 잘 통한다면
그래서 주님과는 왕래를 않고 친구와만 왕래를 한다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주님의 길을 막는 꼴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런 말을 새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통친구봉주님>이라는 말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막아 놓은 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말하자면 우리 집 문 앞까지 주님의 길이 나 있는데
이제 주님께서 내 안으로 오시도록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베드로 사도는 얘기한 다음 “여러분이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이어서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길을 우리가 마련한다고 함은
나에게 오시는 길을 내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도 가시도록 그 길도 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사람들 사이의 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가는 나의 길이 끊겨 있지 않다면
나의 길이 주님의 길과 연결만 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주님께로 갈 수 있을 것이고
주님도 나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2 주일인 오늘 우리는 내가 주님의 길이 되기로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