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보는 것과 관련한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선 요한의 편지에 나오는 말만 나열해보겠습니다.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복음에서도 사도 요한은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보는 사람이고, 보는 것을 중요시한 존재입니다.
맹인이 아니라는 뜻이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벌써 눈치를 채셨겠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독서와 복음은 보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왜 그럴까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러나 성탄절에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성탄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하느님으로 오셨는데
이 보이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된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실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욕심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욕심의 눈은 가졌으되 사랑의 눈을 가지지 못할 때
욕심이 관심을 앗아가 우리는 시선을 빼앗깁니다.
둘째는 세상 것에 눈이 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지녀야 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영적인 사랑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랑에 의해 욕심이 아니라 관심을 지녔을지라도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을 지니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고,
사람과 사물을 사랑으로 보기는 하지만 초월하여 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여 보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초월의 세계를 믿어야 초월하여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라야 믿는 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의 영으로 주님을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을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를.... 인성으로만 보아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은 단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한 다음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영이”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거라고 말합니다.
내가 성체를 영하지만 사실은 내가 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영이 영하는 거라는 얘기이고,
주님의 영은 믿는 이들 안에 머무신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두 제자,
곧 베드로와 요한 사이의 비교랄까 경쟁이랄까 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오늘도 많은 제자들 중에 두 제자만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묻혔던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데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먼저 무덤으로 들어가 보고 요한도 이어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베드로는 그저 보았다고만 하고,
요한은 “무덤에...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보기만 합니까, 요한처럼 보고 믿습니까?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란 말이 복음에서 나왔나 보다고 나름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보는 것은 눈이지만 결국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니 보고 믿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싶네요
눈으로 하루에 수 많은 것을 보았어도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아서 일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고 하셨나 봅니다.
"초월하여 보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초월의 세계를 믿어야 초월하여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라야 믿는 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의 영으로 주님을 봅니다."
일어나는 일들을 믿는 마음으로 보고 아름다운 추억의 앨범을 만들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그 분께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씀드리는 복음적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 보는 새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