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자신의 정체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연하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얘기하는 세례자 요한은 모범이 됩니다.
오늘 1독서 요한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적(Antichrist)이 언급되듯
초대 교회 안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심지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당돌하고 발칙한 그리스도의 적은 아니지만 부지불식간 그럴 수는 있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믿기에 그럴 수 있고
너무 걱정을 함으로써 그럴 수 있으며
메시아 콤플렉스로 인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나는 나를 너무 믿어 구원자는 필요 없다고 밀어낼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친 걱정을 함으로 자신을 못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구원도 믿지 않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걱정이란 자신도 하느님도 못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자신이 마치 메시아, 구원자이기라도 한 듯이
세상 온갖 걱정을 다 도맡아서 하고
무엇이든 자기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함으로써 메시아를 밀어냅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사랑인지 메시아 콤플렉스인지 헷갈리고,
실제로 사랑과 메시아 콤플렉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겸손이 실종됐을 때나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때
사랑이 아닌 메시아 콤플렉스 상태에 있게 됩니다.
세상의 아픔들에 공감하며 뭔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내가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뭔가 해야 한다고 하거나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너무 괴로워하는 것은 강박적 콤플렉스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그러므로
저는 자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야!>라고 해야 합니다.
저에게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오히려 구원 받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협력자와 도구라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그리고 오늘의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세상의 구원을 외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우리는 그분의 소리입니다.
소리만으로는 말이 못 되니 아무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소리 없이 말도 전달될 수 없으니 의미가 없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소리인 우리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헛소리가 되어서도 개의 소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구원을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말씀에 의한, 말씀을 위한 소리여야 함을,
말씀을 떠난 소리는 사라지고 말 공기의 진동일 뿐임을
다시금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직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또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가 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정할 수 있고 그래야 척하는 허욕을 부리지 않아 실망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우울이 아니라 겸손할 수 있고
하느님 앞에 무릎 끊을 수 있고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제자신이 될 것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협력자와 도구"라는 말씀처럼
제 자신의 한계치를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계치를 늘려나가는
제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보는 새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