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한 마디로 쿵짝이 잘 맞은 치유 사건입니다.
나환자가 올바른 자세와 신앙으로 치유를 청하니
주님께서 아주 흔쾌히 나환자의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치유청원과 치유 사이에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벙어리 영에 사로잡힌 아들을 둔 아버지와
주님 사이에 있었던 작은 실랑이와 비교하면
나환자에 대한 주님의 치유가 얼마나 산뜻한지 알 수 있습니다.
벙어리 영에 사로잡힌 아들의 아버지는 주님께 이렇게 청하지요.
“이제 하실 수 있으시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이에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뜻이냐고 면박을 주십니다.
어찌하여 “하실 수 있으시면”이라는 쓸 데 없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와 비교하면 “하실 수 있으십니다.”고 나환자가 한 말은
아주 모범적인 믿음의 고백이요, 청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비판적으로 오늘 얘기를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하고자만 하시면”도 “하실 수 있으십니다.”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청원에 있어서 다 군더더기입니다.
아니, 군더더기보다 더 나쁘게 평가하면 믿음부족의 표시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고 뭣 하러 말합니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하듯 격려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권하는 말이 있지요.
자신 없어 하는 사람에게 "I can do it"을 주문처럼 하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없는 사람,
자신을 참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나는 할 수 있어!”라고 할 필요 없지요.
그런 것인데 주님께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고 뭣 하러 말합니까?
자신감이 없는 주님께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런 방자한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 부족한 내게 하는 거겠지요.
“하고자 하시면”이란 말도 군더더기 말이고 믿음 부족의 말입니다.
좋게 이해하면 주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표현이고,
주님의 선의를 믿는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더 완전하게 믿는다면 이런 표현조차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에게 먹을 것을 청하면서
마음만 있으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자식의 건강을 위해 안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에게 주실 마음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불경한 말인 것처럼
하느님의 선의에 대한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거나 불경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할 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주님, 불쌍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믿음의 상태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환자도 완전히 믿지 못하다가 치유를 체험하고 나서
더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더 완전히 믿는 자 되었기에
주님께서 이 치유의 기적에 대해 함구하라고 하시지만
나환자는 입을 다물 수 없어 구원자 주님을 널리 드러냅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서 더 나아가 주님의 선포자와 공현자가 된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뭔가를 요구할 때
자식은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걸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본능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원의 대로 말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바른 말이 말대답이라는 말씀도 많이 들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름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라는 성경말씀을 깨달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뭔지는 모르지만
부모로 부터 믿을 만한 신뢰와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모의 원형이 하느님이시라고 하듯이 사랑은 이렇게 전이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부모없이 태어난 자식도 자식 없이 부모된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이 아닐까... 갑자기 드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아픈 현실을 바라보며 부모에게 신뢰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신뢰와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사랑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이 순간 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서 더 나아가 주님의 선포자와 공현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