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제가 수련을 시킨 마지막 그룹이 첫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의 첫 서원을 보면서
첫 서원을 했던 30여 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를 돌아보았고,
첫 서원을 한 이 형제들이 30여 년이 지나면 어찌 될까 생각해봤습니다.
아울러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저도 이 형제들을 위해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이것저것 당부한 다음
다음과 같은 기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저희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그러므로 저나 이 형제들 모두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로 내가 원하는 자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저희 프란치스칸의 이상적인 수도생활이지요.
그런데 공자도 이런 내용의 말을 이미 한 바 있습니다.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이 말씀을 제 나름대로 풀이를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나이 30이 되면 자기의 뜻을 세워야 하고,
40이 되면 그 뜻이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50이 되면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고,
60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뿐 아니라 하늘의 뜻을 순히 따르게 되며,
이제 70이 되면 내 욕심대로 해도 그 욕심이 하늘의 뜻과 같아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게 되는 경지에 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오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부부나 형제로 살아가면서
같은 바람을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바라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 때
나의 뜻을 꺾을 것도, 너의 뜻에 힘들게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굳이 순종하지 않고 사랑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간에도 이렇게 바라는 것이 같고 뜻이 맞으면 좋은데
하느님과 우리가 바라는 게 같고 뜻이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공자는 나이 70에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의 편지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하라 하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실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 청하라는 것인데
그런데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주님의 뜻이 잘 들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도에서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와 내가 남남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
나의 뜻이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며,
주님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는 그 일원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우리의 뜻이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우리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 된다'는 걸로 기억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내면으로 부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 아닐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대답 할 수 있을 것이고
"너와 내가 남남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
나의 뜻이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며,
주님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는 그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기 위해 저 부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서 찾는 오늘을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