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독서는 욥기의 얘기입니다.
욥기를 읽으면 구구절절 공감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고,
저와 같이 마음이 편치 않은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편치 않은 첫 번째 이유는 미안함 때문입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이 편찮으신데 비해 저는
마라톤을 뛸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것이 아주 미안하고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치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제가 행복한 것이 불행한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진정 제 주변에는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많은 욥들이 있습니다.
이들 앞에서 저는 마음껏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같이 불행해질 수 없기에 미안한 것입니다.
편치 않은 두 번째 이유는 조심스런 마음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자주 범한 잘못이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이었습니다.
욥의 마음과 아픔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사인 양 훈수드는 잘못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고통을 더 주신다느니,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 아무 것도 없을 수 없다느니,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니 외려 기뻐하라느니,
고통은 죽음과 부활의 그 파스카 신비에 참여케 하는 거라느니,
하나 틀린 말 없지만 아픔에 동참치 않는 신학 강의일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신학 강의는 전혀 사랑이 아니고
심지어 자기를 뽐내는 것일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오늘 복음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시어”
이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과 맥이 닿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가시고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사랑 없으면 다가가지도 않으니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더 진실되려면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앞서야 합니다.
신학 이론이나 강론으로 그들에게서 아픔을 꺼내줄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병을 치유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아픔을 꺼내주겠다고 건방지게 다가가지 말고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그저 같이 아파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같이 아파하는 것 이상으로 뭘 하려는 것은 교만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치유를 내가 대신하려는 월권이고,
하느님의 환자를 내가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파하는 사람을 주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는 중풍 병자의 치유 얘기에서 볼 수 있는 그 도우미처럼 하는 겁니다.
그 도우미들은 중풍 병자의 오랜 아픔을 진정 같이 아파했습니다.
그랬기에 다가갔고, 그리고 주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중풍 병자에게 가서 분명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 한 번 가 보자.
그분을 한 번 믿어보자.
그분의 능력을 한 번 믿어보고, 그분의 사랑을 한 번 믿어보자.
지금까지 수많은 치료도 소용없어 자포자기의 중풍 병자이지만
이들의 진실한 사랑에 마음이 움직여 믿어보기로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우미들처럼 주님의 치유의 겸손한 도우미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