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비유에서 지옥의 부자는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거라고 하는데
제 생각에 부자와 그들이란 이런 사람입니다.
누가 와도 믿지 않을 사람.
누가 와도 회개치 않을 사람.
누가 와도 문을 열지 않을 사람.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사람.
하느님이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인생역전의 비유입니다.
나자로가 이승에 살 때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지였지만
천국에 갔고 천국에서는 이름 있는 사람, 곧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이승에 살 때 틀림없이 누구나 그 이름을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죽어 지옥에 가서는 이름이 없는 부자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부자였지만 불행한 사람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성북동이고 한국의 최고 부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저를 보러오셨다가 그 집들을 본 분들은 하나같이 집 참 좋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드는 생각이
‘그런데 이 사람들 이 집 안에서 행복할까?’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불행할 거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괜히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나 시기심에서 오는 억측일 수도 있고,
옛날에는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이들의 속살을 들여다본 지금은 정말 마음으로부터 오는 연민이 있습니다.
그들의 굳게 닫힌 문만큼이나 그들은 안팎으로 단절의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고립적인 고독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단단히 문을 닫아걸어야 했을까요?
저는 이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Privacy 문화를 생각합니다.
Privacy는 우리말로 사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흔히 Privacy를 침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누리려는데
거기에 누가 비집고 들어오면 침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편안하고
이곳에서만 나는 자유롭습니다.
나 혼자 있을 때만 편안하고 자유롭기에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부자유하며
내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침범자가 됩니다.
그래서 나만의 편안함에 안주하려 하고
그럴수록 같이 살면서는 평안도 없고 평화는 더더욱 없습니다.
자유롭기를 그렇게 원하지만 나 혼자 있을 때만 자유롭기에
그 자유는 다른 사람에 의해 너무 쉽게 깨어지는 허약한 자유입니다.
이 편안함에의 안주와 허약한 자유가
이웃을 침입자로 만들어 이웃과 단절케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은 있지만 평안이나 평화는 없으며
자유는 있지만 사랑해야 할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과 단절함으로 하느님과도 단절되는 지옥에 스스로 갇힌 것입니다.
지옥이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이며
뜨거운 불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불태울 사랑이 없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천당이 장소가 아니라 관계이듯 지옥도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이고
누가 와도 거절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환경하면 물리적인 환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환경은 물리적인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서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이고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구랑 만나 친구가 " 우리 어디서 먹을까?"라고 두리번 거리며 음식점을
찾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서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 란다. 라고....
"지옥이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이며
뜨거운 불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불태울 사랑이 없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천당이 장소가 아니라 관계이듯 지옥도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처럼 나는 누구와 함께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이 순간 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