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일반적인 통념에 수동적인 태도는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무엇 하나 스스로 하지 못하고 시켜야만 한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생이 좌지우지되고 짓밟히기도 할 것입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백수가 되어 무위도식할 것입니다.
누가 불러내지 않으면 두문불출, 방콕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만 있는 폐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 통념적으로는 좋지 않은 수동적인 태도가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는 다른 얘기가 됩니다.
사회적인 무능력의 수동태가 아닙니다.
스스로 할 자신이 없는 수동태도 아닙니다.
삶의 목적을 상실한 자포자기의 수동태도 아닙니다.
의존적이고 노예근성의 수동태는 더 더욱 아닙니다.
신앙적인 수동태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의 수동태이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수동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향해 가는 행복한 수동태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귀염을 받는 왕자와 공주의 수동태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수동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야훼의 종의 수동태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해서
하느님 뜻대로 하는 수동태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싫다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뜻하시는 것이면 나도 좋아서
이제는 더 이상 싫은 것이 없으며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선으로 받아들이는 수동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고통도 선이어서
거역하지도 꽁무니를 빼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도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도 턱을 내밉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맞아도, 수염을 뽑혀도, 욕설과 침 뱉음을 당해도
화가 나지도, 부끄럽지도 않아 얼굴 빛 차돌처럼 변하지 않고 평화롭습니다.
싸움이 있어야 평화가 깨지는데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니, 그것도 기꺼이 받아들이니 평화롭습니다.
세속의 종들은 힘에 의해 억지로 수동적이지만
야훼의 종은 능동적인 수동태입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성자의 성부에 대한 그 사랑의 수동태입니다.
사랑을 하면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내맡깁니다.
구워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 하고,
‘날 잡아 잡수’하고 자신을 내어줍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통은 사랑의 불을 더욱 지르는 불쏘시개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바치는 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제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을 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전부 바칩니다.
영원히 그와 하나 되는 열락을 열망하면서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희망하면서 전부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