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을 바칠 때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합니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고.”
이 신앙 고백을 할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다른 죽은 이들은 언제 부활하였을까?
제자들은 언제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까?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부활의 시차 때문입니다.
봄이 왔어도 싹을 일찍 내미는 것과 늦게 내미는 것이 있고,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와 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듯이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그리고 오늘 부활하셨지만
어떤 제자는 한참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우리 중의 누구는 아직도 사순 시기를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중의 상당수는 어쩌면 사순 시기도 성탄 시기도
시작되기 이전의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미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어 있으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실제로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으며
가짜로 죽거나 반쯤 죽으면 부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죽었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데
이때의 죽음은 어떤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종종 ‘그 사람 자존심 다 죽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일단은 이런 자존심의 죽음이 자기가 죽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자존심이란 관계적인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자존심을 가지거나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존귀함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고,
특히 누군가가 자기를 무시하거나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
자기가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자기가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십니다.
아니, 이런 자기가 죽을 때 내가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게 되고,
하느님 안에서 태어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성주간 저는 세월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3보1배에 동참했는데
이 기간 저는 찜질방에서 잠자리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성금요일에 발생했습니다.
성 목요일 비가 왔고 운동화가 젖어 저는 운동화를 빨아 고온 사우나실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꼭두새벽에 말렸는데
하필 주인이 제가 잠깐 비운 사이 나타나 신발을 치워버린 것입니다.
신발을 찾으러 갔을 때 제 신발에서 구린내가 나 다른 손님들이 싫어한다고
주인이 저의 잘못 이상으로 지나치게 화를 냈어도
처음에는 저의 잘못이었기에 잘못했다고 공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신발을 돌려달라고 하자 신발을 버렸다는 거였고,
이 말을 듣자 처음에 참았던 분노가 제 안에서 다시 올라 오는 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저 사람의 분노에 같이 분노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자 오늘이 성금요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숨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인의 분노 앞에 서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자
저의 분노는 사라지고 그리스도께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 말입니다.
제가 당한 모욕과 수치는 주님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저는 제가 잘못해서 모욕과 수치를 당한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탓도 없는데도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당한 수치와 모욕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 모욕과 수치는 모욕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한 모욕과 수치는 제가 원치 않은 것이었으니
하느님께서 제 탓을 통해서 은총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 부활하시도록 하느님께서
성금요일에 마련해주신 것, 곧 <자기의 죽음의 처방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죽음은 끝이 아니어서
저의 나머지 3보1배는 죽어야 할 나와의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제가 완전히 죽지 않아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얘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아무튼
이 고약한 자기, 죽어야 할 자기는 참으로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고
죽어야 할 자기가 거듭 살아난다는 것은 아마도 또 다시 죽고
또 다시 부활해야 할 우리의 운명인가 봅니다.
옛날에 제가 담배 피울 때 사순절이 되면 담배를 끊고
부활절이 되면 담배를 다시 피웠는데
영원히 끊기 위해 담배를 끊은 것이 아니라
다시 피우기 위해서 끊었던 그 수준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가 묵상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게는 끊임없이 죽어야 할 자기와 살아야 할 자기가 있는데,
세상 것에 집착하는 나는 죽어야 하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나는 살아야 하며,
자기를 주장하는 나는 죽어야 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나는 살아야 하며,
자기 연민의 나는 죽어야 하고
타인을 연민하는 나는 살아야 하며,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는 죽어야 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나는 살아야 함을 묵상하는 이번 부활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희노애락을 몸소 겪으셨기에
우리네 처지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넘 공감하시고 하나가 되어주시는거죠.
신부님도 뻔뻔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차라리 고개가 숙여지지요.
살다보면 자신의 부족함을 드려내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드러날까봐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뻔뻔함이 아니라 아..! 저렇게 솔직 담백하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가르침이 되지요.
글구 저도 삭발하는 장면과 3배 1보하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눈물이 나더군요.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리며,
제가 글을 쓸 수 없는 곳에 일주일 가게 되어 뎃글을 올릴 수가 없네요.
이런 멘트도 신부님에게 배웠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