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데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 인간이 느끼는 두 감정이
바로 이 <두려움>과 <기쁨>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흔히 느끼는
이 두 감정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보통 기쁨은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은 안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얄팍한 감정 이해입니다.
두려움도 기쁨도 다 두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 차원과 신적인 차원 말이지요.
먼저 두려움에 대해서 보겠고,
그중에서도 극복해야 할 두려움에 대해서 먼저 보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꽤 많이 하시는데
사람들, 특히 세상의 권력자나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의 목숨을 앗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에
이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도무지 없고
정작 두려워 할 분은 영원한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야 하고,
그렇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극복해야 합니다.
아주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최악을 각오하면 웬만한 악은 두렵지 않고,
조폭을 무서워하면 동네 깡패 정도는 안 두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조폭도 최악도 아니시고
오히려 너무도 인자하시고 최고선이시시기에
우리가 그렇게 믿고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더더욱 확실하게 극복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야 하고,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승화시키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의 두려움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악습을 몰아내는 덕>에서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고 얘기하는데,
이때 ‘주님의 두려움’이 라틴어로는 ‘Timor Domini’입니다.
이 ‘Timor Domini’를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주님의 두려움’으로 번역한다면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겠지요.
이는 마치 갓난아기가 병이 나는 것은
그 아기보다 어미가 더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제가 저를 걱정하는 것보다
저의 어머니께서 저를 더 걱정하시고 많이 걱정하셨지요.
그러므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보다 더 내가 잘못 될까 걱정하시는 하느님,
나보다 더 원수가 침입할까 두려워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우리가 그분을 믿기만 하고 그분 두려움 앞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원수도 침입자도 박해자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쁨도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을 소유하는 기쁨,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으로 나아가고 승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선 자의
두려움과 기쁨을 꿈꾸고 갈망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보다 더 내가 잘못 될까 걱정하시는 하느님,
나보다 더 원수가 침입할까 두려워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우리가 그분을 믿기만 하고 그분 두려움 앞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원수도 침입자도 박해자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