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주님의 애제자라고 불리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보다도 먼저 뵙는 얘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애제자보다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내 보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떤 애제자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일까요?
역사상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성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를 연인 사이로 묘사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유명한 작가는 그의 역작,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그리스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기까지 하였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를 이렇게 생각지는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더나 덜 사랑하기에 누구에게 먼저나 나중에 나타나신다고 믿지도 않지요.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을
다른 애제자들보다 먼저 만나 뵈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랑과 포기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제자들은 권력과 성공을 사랑한 것의 차이이기도 하고요.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권력 암투를 하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권력을 잡게 되면
애제자 셋 중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베드로를 제치고
권력의 좌우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요.
이것을 놓고 볼 때 애제자라고 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권력과 성공을 쫓아 따른 것이지
결코 주님을 사랑해서 따른 것이 아니라고 봐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애제자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다음,
그리고 빈 무덤을 확인한 다음 자기들의 권력의 꿈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여인이기에
결코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를 봅니다.
왜냐면 저도 자기 성취적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보다 더 일적이고 자기 성취적이라고 하지요.
저도 영락없는 남자이고
지금의 저는 과거의 저보다 나아진 면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주님을 사랑해서 따르는지 저의 성취를 위해서 따르는지
그래서 참으로 세심한 영적인 식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이건 사람이건 나의 성취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과 사람을 얼마나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